협업을 위한 판을 스스로 만들 줄 아는
지구력 있는 커뮤니티 기획자, 김민지 님
* 이 인터뷰는 뉴그라운드의 일대일 인터뷰 프로그램을 통해 정리된 결과물입니다.
‘모스'라는 이름으로 줌에 접속하셨어요.
이끼의 생명력을 닮고 싶어서 지은 닉네임이에요. 원래 예전에 활동했던 하자센터에서 쓴 닉네임은 상추였어요. 초록색이 좋아서 지은 이름이었죠. 이번에 새로운 조직에 입사하면서 새롭게 별명을 지어야 한다길래 쓰던 걸 그대로 쓸까, 의미를 담은 무언가를 써볼까 생각하다가 이끼를 떠올렸어요. 이끼의 생명력, 이끼가 뒤덮인 자연 같은 게 주는 느낌을 닉네임에 담고 싶더라고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시민공론장을 다루는 활동가로 일했어요. 여기서 저는 시민공론장을 기획 및 운영했고, 이슈 커뮤니티도 운영했어요. 용역사와의 회의를 준비하고, 강의 교안과 PPT 자료를 제작하고, 행사를 기록하고 참가자 커뮤니케이션도 담당했어요. 회고를 진행하거나 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 블로그 글을 포스팅하고, 댓글을 달고, 커뮤니티 플로우를 관찰하고 게시글을 올리기도 했고요.
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신 거네요.
처음 이 조직에 지원할 때 제가 생각했던 커뮤니티란, 개인 간의 연결이 조금 더 돋보이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일하며 경험한 커뮤니티는 조금 더 단기적으로, 하나의 아젠다를 깊이 파고들어 연결된 후 해산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상상한 커뮤니티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명확한 이슈로 만들어진 커뮤니티이다 보니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재미있었어요. 느슨한 연결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약간 더 날카로운 의견도 개진할 수 있는 곳이었달까요. 그런 면에서 배운 게 있어요.
그중 민지 님이 가장 재미를 느꼈던 업무는 무엇인가요?
회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이요. 기획의 초기 단계에서 용역사가 원하는 것과 우리 조직이 원하는 것이 충돌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맞춰가고 조율하는 단계에서 재미를 느껴요. 오늘 회의에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어떤 의견을 개진하거나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이 즐거웠어요.
의견 조율을 더욱 원활하게 만드는 민지 님의 노하우도 있을까요?
저는 기록 중심적인 사람이라 기록에 기반해서 의사소통하는 것을 선호해요. 이건 지금 제가 있는 조직에서 배운 것이기도 해요. 논의의 과정을 공유한다는 게 힌트가 될 것 같아요. 대화를 하다 보면 휘발되는 부분이 많은데, 기록하며 이야기하면 조금 더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최대한 그대로 받아적는 편이에요. 더불어 ‘그래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록을 중요한 꼭지별로 구분하는 작업도 하는 편이죠. 그랬을 때 상대방과 제가 나눈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기록에 기반해서 의사소통하는 것을 선호해요.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도 중요하고요."
중간 단계의 커뮤니케이션을 잘하시는 게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민지 님은 첫 번째 커리어를 어떤 일로 꼽으시나요?
하자센터의 고3 수험생을 위한 스프링캠프에서 청소년의 활동을 돕는 퍼실리테이터로 일했던 경험이요. 원래 저는 하자센터를 이용하는 청소년이었어요. 성인이 되니까 더 이상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더라고요. 그러던 중 센터에서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데 스태프로 참여해볼래?”라는 제안을 주셔서 프로젝트 단위로 참여했어요. 구체적으로는 청소년들이 캠프에 와서 잘 적응하고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한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이때 오신 멘토분들의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일이라는 것이 꼭 회사에 취직해서 뭔가를 하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배웠어요. 아무튼 이 경험이 중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맡았던 첫 번째 커리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또 주요하게 언급하고 싶은 커리어가 있을까요?
2017년 2월부터 8월까지 하자센터의 토요진로학교 ‘게임학교’에서 청년활동가로 일한 경험이에요. SBS의 <수저게임>을 기반으로 대형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리뉴얼했어요. 흙수저와 은수저, 금수저를 나누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게임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불공정한 출발선이잖아요. 그런데 게임을 하면서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책과 제안을 발견하는 게 목적이었고, 그것이 인상 깊었어요.
청소년들과 게임을 한 번 해보고 끝내는 건 아쉬워서 회고 세션도 기획했어요. ‘내가 현실로 돌아갔을 때 꼭 실천하고 싶은 한 가지는?’이라는 질문을 던졌죠. 게임과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질문을 직접 생각하고, 설계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민지 님은 일에서 기술적으로 성장하는 순간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찾을 때 보람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동안 몸담으셨던 조직의 성격이나, 민지 님이 맡으셨던 업무들의 면면을 보면요.
‘기술적으로 성장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던 때도 있어요. 2020년 7월부터 12월까지 공공기관에서 파트타임 코디네이터로 일했는데, 엑셀 양식을 효율적으로 바꿔놓고 나왔어요. 단시간 근로자인데 욕심을 좀 내려놓을까, 라는 고민도 했지만 그래도 제가 들어갔다가 나온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엑셀 양식을 새롭게 만들고 마스터 파일을 드린 후 나왔죠.
저는 이왕이면 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하루에 8시간이나 일하는데,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그게 저였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나한테만 의미있는 일이나 시간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랬을 때 받게 되는 질문들, 이를 테면 ‘넌 활동가인데 왜 자꾸 돈을 더 달라고 해?’라는 말에서 자유롭지 않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직업은 내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하고, 사이드프로젝트 등에서 사회적인 가치를 조금 더 탐색하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해요. 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제가 기로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이걸 고민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요. 그럼 나의 전문성은 뭘까? 강점은 뭐지? 어떤 점을 살려서 영리 영역으로 넘어가야 하지? 라는 고민을 많이 해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나한테만 의미있는 일이나 시간이 아니면 좋겠어요."
그럼, 민지 님이 하시는 일이 사회적 의미를 만들고 있다고 느낀 구체적인 순간 또는 장면이 있나요?
공론장을 기획할 때 참가자들이 소감을 남기는 시간을 꼭 만들어요. 그때 ‘이 공론장이 없었다면 다른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 같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또래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라는 피드백을 주신 분들이 계셨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의미 있는 자리를 만들었구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좋은 질문을 상상하기를 좋아하는데 쉽지 않아요. 의도가 너무 티나면 매력적이지 않고, 꼭 생각해보길 바라는 지점을 잘 녹여서 따뜻한 말로 표현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요.
민지 님에게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인가요?
질문을 받는 사람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질문, 너무나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두드려보는 질문, 그 사람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질문이면 좋은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좋은 질문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하시나요?
동료들에게 많이 물어봐요. “이 활동 마무리에 이런 질문을 할 건데 괜찮을까요?”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 같진 않을까요?” “비슷한 결의 답변만 나오지는 않을까요?” 등등 우려되는 점들을 동료들과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저는 쉬운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하는데, 가끔은 너무 단편적이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균형을 찾기가 어려워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향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질문,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두드려보는 질문,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질문이
좋은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일하시는 동안 좀 더 키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역랑이나, 앞으로 일해보고 싶은 분야도 있었을까요?
공론장을 기획하는 일을 하다 보니 명확한 아젠다를 가지고 활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론장을 기획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나 시민을 모으고 제가 조직하는 사람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어떤 분야의 이야기를 꺼내도 대강은 이해하지만 한 분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역량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청소년 교육 분야로 커리어를 이어가 볼까 싶기도 해요. 혹은 비영리 영역이 아닌 곳이라면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살릴 수 있는 부서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민지 님이 가장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서도 듣고 싶네요.
개개인에게 자율성을 주는 환경을 선호해요. 하나의 일을 둘러싼 여러 개의 요소, 세부 단위의 업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균형 있게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일과 관련해서 동료들과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인지도 중요하죠. 보수적인 조직이라도 일관성이 있다면 괜찮아요.
절대 참을 수 없는 업무 환경은요?
성희롱이 벌어지는 조직이요. 성평등하지 않은 조직을 절대 참을 수 없어요. 사실 저는 일터를 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으로 평가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일터가 아니라면, 잘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 참기 어려운 것은 실적 경쟁이에요. 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분들의 채용을 알선해주는 부서에 있었던 적이 있어요. 얼마나 전화 상담을 많이 했는지, 사업체들이 채용을 몇 건 달성했는지, 그런 실적이 옆자리에 앉은 동료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등을 평가받았어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내가 사회복지를 왜 전공했지?’ 싶은 생각이 들어 힘들더라고요. 사람을 사고파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복지관 이용자분들도 각자 다른 욕구가 있고 원하는 일과 원하지 않는 일이 있는데, 보통 일괄적으로 같은 일을 권장 드리거든요. 그런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민지 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왕이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그런 변화를 만들고 싶고, 그쪽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일로 삼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보상의 적정선을 찾지 못하면 그 행복이 유지되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 수준, 그러니까 저에게 있어서 적정한 선은 어느 정도인지를 탐색하는 단계에요. 그런 면에서 노동 이슈에도 관심이 생겨요.
일이 만들어내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하는 개인의 삶이 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거네요. 그런 맥락에서 조직 바깥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시는 활동이나 프로젝트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친구와 함께 ‘추수작업실’이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 일과 놀이, 나와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삶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이 균형을 함께 가꿔가는 주간회고, 책모임 등을 하는 2인 커뮤니티예요. 도시 속 버려진 것, 쓸모를 다한 것들을 탐색하며 새로운 시선과 의미를 부여하는 사진 기반의 프로젝트, ‘어벡스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개인적 관심사로 프로젝트를 꾸렸지만 추진력 있게 치고 나가지는 못해서 약간의 부담을 안고 있어요. 2022년에는 좀 더 앞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운동도 저에게는 중요한 활동이에요.
운동을 중요한 활동으로 꼽으시는 게 독특해요.
20대 초반까지 6년간 복싱을 했고, 짧게 선수 생활도 했어요. 운동의 특성과 체육관 문화 때문에 복싱을 그만둔 뒤에는 요가를 배웠고요. 요가 강사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4주 워크숍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아 수업을 꾸려본 경험도 있습니다.
복싱을 한 것이 끈기와 몰입의 한계를 최대치로 경험하는 시간이었을 듯해요. 이 시간이 민지 님께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제일 크게 배웠던 건, 걱정하고 있을 시간에 연습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걱정하고 있는다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걱정할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무언가를 해야 해요. 그래야 변화가 생기든, 다음 기회가 오든, 성과를 내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가장 크게 배웠어요.
이때 배운 사고방식이 저에게 중요한 게, 지금도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하게 돼요. 지금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자. 작고 사소한 거라도. 그런 마인드셋이 생긴 것 같아요.
인터뷰, 정리. 황효진 (뉴그라운드 공동 대표)
인터뷰어 효진의 코멘트
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에게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일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잡다한 업무'가 정말 정말 많으며, 내가 하는 일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 정도라고 여겨질 때도 있으니까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눈으로 확인 가능하거나 직관적으로 설명 가능한 역량이 아닐 때, 우리는 나에게 전문성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될 수 있는 판을 설계하고, 이끌어가는 역량은 아주 희귀하고 소중한 것 아닐까요? 민지 님이 첫 번째 커리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쌓고 있는 역량이 바로 이런 것이겠고요.
가고자 하는 방향(목표)을 설정하고, 거기에 필요한 판의 세부 요소를 설계하고, 그 판 위에서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는 활동이 일어나도록 촉진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미를 찾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일. 그러니까 민지 님은 커뮤니티를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심지어 조직 바깥에서 동료들과 추수작업실과 어벡스프로젝트를 꾸리신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 줄 아는 분이기도 하죠. 영역과 조직, 직무를 불문하고 사람을 모으고 협업해서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자리라면 민지 님께 잘 어울리는 곳일 거예요. 무엇을 하든 지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민지 님의 2022년에 큰 응원을 보냅니다.
협업을 위한 판을 스스로 만들 줄 아는
지구력 있는 커뮤니티 기획자, 김민지 님
* 이 인터뷰는 뉴그라운드의 일대일 인터뷰 프로그램을 통해 정리된 결과물입니다.
‘모스'라는 이름으로 줌에 접속하셨어요.
이끼의 생명력을 닮고 싶어서 지은 닉네임이에요. 원래 예전에 활동했던 하자센터에서 쓴 닉네임은 상추였어요. 초록색이 좋아서 지은 이름이었죠. 이번에 새로운 조직에 입사하면서 새롭게 별명을 지어야 한다길래 쓰던 걸 그대로 쓸까, 의미를 담은 무언가를 써볼까 생각하다가 이끼를 떠올렸어요. 이끼의 생명력, 이끼가 뒤덮인 자연 같은 게 주는 느낌을 닉네임에 담고 싶더라고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시민공론장을 다루는 활동가로 일했어요. 여기서 저는 시민공론장을 기획 및 운영했고, 이슈 커뮤니티도 운영했어요. 용역사와의 회의를 준비하고, 강의 교안과 PPT 자료를 제작하고, 행사를 기록하고 참가자 커뮤니케이션도 담당했어요. 회고를 진행하거나 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 블로그 글을 포스팅하고, 댓글을 달고, 커뮤니티 플로우를 관찰하고 게시글을 올리기도 했고요.
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신 거네요.
처음 이 조직에 지원할 때 제가 생각했던 커뮤니티란, 개인 간의 연결이 조금 더 돋보이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일하며 경험한 커뮤니티는 조금 더 단기적으로, 하나의 아젠다를 깊이 파고들어 연결된 후 해산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상상한 커뮤니티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명확한 이슈로 만들어진 커뮤니티이다 보니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재미있었어요. 느슨한 연결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약간 더 날카로운 의견도 개진할 수 있는 곳이었달까요. 그런 면에서 배운 게 있어요.
그중 민지 님이 가장 재미를 느꼈던 업무는 무엇인가요?
회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이요. 기획의 초기 단계에서 용역사가 원하는 것과 우리 조직이 원하는 것이 충돌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맞춰가고 조율하는 단계에서 재미를 느껴요. 오늘 회의에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어떤 의견을 개진하거나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이 즐거웠어요.
의견 조율을 더욱 원활하게 만드는 민지 님의 노하우도 있을까요?
저는 기록 중심적인 사람이라 기록에 기반해서 의사소통하는 것을 선호해요. 이건 지금 제가 있는 조직에서 배운 것이기도 해요. 논의의 과정을 공유한다는 게 힌트가 될 것 같아요. 대화를 하다 보면 휘발되는 부분이 많은데, 기록하며 이야기하면 조금 더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최대한 그대로 받아적는 편이에요. 더불어 ‘그래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록을 중요한 꼭지별로 구분하는 작업도 하는 편이죠. 그랬을 때 상대방과 제가 나눈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기록에 기반해서 의사소통하는 것을 선호해요.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도 중요하고요."
중간 단계의 커뮤니케이션을 잘하시는 게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민지 님은 첫 번째 커리어를 어떤 일로 꼽으시나요?
하자센터의 고3 수험생을 위한 스프링캠프에서 청소년의 활동을 돕는 퍼실리테이터로 일했던 경험이요. 원래 저는 하자센터를 이용하는 청소년이었어요. 성인이 되니까 더 이상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더라고요. 그러던 중 센터에서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데 스태프로 참여해볼래?”라는 제안을 주셔서 프로젝트 단위로 참여했어요. 구체적으로는 청소년들이 캠프에 와서 잘 적응하고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한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이때 오신 멘토분들의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일이라는 것이 꼭 회사에 취직해서 뭔가를 하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배웠어요. 아무튼 이 경험이 중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맡았던 첫 번째 커리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또 주요하게 언급하고 싶은 커리어가 있을까요?
2017년 2월부터 8월까지 하자센터의 토요진로학교 ‘게임학교’에서 청년활동가로 일한 경험이에요. SBS의 <수저게임>을 기반으로 대형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리뉴얼했어요. 흙수저와 은수저, 금수저를 나누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게임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불공정한 출발선이잖아요. 그런데 게임을 하면서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책과 제안을 발견하는 게 목적이었고, 그것이 인상 깊었어요.
청소년들과 게임을 한 번 해보고 끝내는 건 아쉬워서 회고 세션도 기획했어요. ‘내가 현실로 돌아갔을 때 꼭 실천하고 싶은 한 가지는?’이라는 질문을 던졌죠. 게임과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질문을 직접 생각하고, 설계했던 첫 번째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민지 님은 일에서 기술적으로 성장하는 순간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찾을 때 보람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동안 몸담으셨던 조직의 성격이나, 민지 님이 맡으셨던 업무들의 면면을 보면요.
‘기술적으로 성장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던 때도 있어요. 2020년 7월부터 12월까지 공공기관에서 파트타임 코디네이터로 일했는데, 엑셀 양식을 효율적으로 바꿔놓고 나왔어요. 단시간 근로자인데 욕심을 좀 내려놓을까, 라는 고민도 했지만 그래도 제가 들어갔다가 나온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엑셀 양식을 새롭게 만들고 마스터 파일을 드린 후 나왔죠.
저는 이왕이면 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하루에 8시간이나 일하는데,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그게 저였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나한테만 의미있는 일이나 시간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랬을 때 받게 되는 질문들, 이를 테면 ‘넌 활동가인데 왜 자꾸 돈을 더 달라고 해?’라는 말에서 자유롭지 않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직업은 내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하고, 사이드프로젝트 등에서 사회적인 가치를 조금 더 탐색하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해요. 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제가 기로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이걸 고민하는 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요. 그럼 나의 전문성은 뭘까? 강점은 뭐지? 어떤 점을 살려서 영리 영역으로 넘어가야 하지? 라는 고민을 많이 해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나한테만 의미있는 일이나 시간이 아니면 좋겠어요."
그럼, 민지 님이 하시는 일이 사회적 의미를 만들고 있다고 느낀 구체적인 순간 또는 장면이 있나요?
공론장을 기획할 때 참가자들이 소감을 남기는 시간을 꼭 만들어요. 그때 ‘이 공론장이 없었다면 다른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 같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또래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라는 피드백을 주신 분들이 계셨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의미 있는 자리를 만들었구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좋은 질문을 상상하기를 좋아하는데 쉽지 않아요. 의도가 너무 티나면 매력적이지 않고, 꼭 생각해보길 바라는 지점을 잘 녹여서 따뜻한 말로 표현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요.
민지 님에게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인가요?
질문을 받는 사람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질문, 너무나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두드려보는 질문, 그 사람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질문이면 좋은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좋은 질문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하시나요?
동료들에게 많이 물어봐요. “이 활동 마무리에 이런 질문을 할 건데 괜찮을까요?”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 같진 않을까요?” “비슷한 결의 답변만 나오지는 않을까요?” 등등 우려되는 점들을 동료들과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저는 쉬운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하는데, 가끔은 너무 단편적이라는 피드백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균형을 찾기가 어려워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향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질문,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두드려보는 질문,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질문이
좋은 질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일하시는 동안 좀 더 키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역랑이나, 앞으로 일해보고 싶은 분야도 있었을까요?
공론장을 기획하는 일을 하다 보니 명확한 아젠다를 가지고 활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론장을 기획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나 시민을 모으고 제가 조직하는 사람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어떤 분야의 이야기를 꺼내도 대강은 이해하지만 한 분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역량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청소년 교육 분야로 커리어를 이어가 볼까 싶기도 해요. 혹은 비영리 영역이 아닌 곳이라면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살릴 수 있는 부서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민지 님이 가장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서도 듣고 싶네요.
개개인에게 자율성을 주는 환경을 선호해요. 하나의 일을 둘러싼 여러 개의 요소, 세부 단위의 업무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균형 있게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일과 관련해서 동료들과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인지도 중요하죠. 보수적인 조직이라도 일관성이 있다면 괜찮아요.
절대 참을 수 없는 업무 환경은요?
성희롱이 벌어지는 조직이요. 성평등하지 않은 조직을 절대 참을 수 없어요. 사실 저는 일터를 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으로 평가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일터가 아니라면, 잘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 참기 어려운 것은 실적 경쟁이에요. 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분들의 채용을 알선해주는 부서에 있었던 적이 있어요. 얼마나 전화 상담을 많이 했는지, 사업체들이 채용을 몇 건 달성했는지, 그런 실적이 옆자리에 앉은 동료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등을 평가받았어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내가 사회복지를 왜 전공했지?’ 싶은 생각이 들어 힘들더라고요. 사람을 사고파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복지관 이용자분들도 각자 다른 욕구가 있고 원하는 일과 원하지 않는 일이 있는데, 보통 일괄적으로 같은 일을 권장 드리거든요. 그런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민지 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왕이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그런 변화를 만들고 싶고, 그쪽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일로 삼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보상의 적정선을 찾지 못하면 그 행복이 유지되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 수준, 그러니까 저에게 있어서 적정한 선은 어느 정도인지를 탐색하는 단계에요. 그런 면에서 노동 이슈에도 관심이 생겨요.
일이 만들어내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하는 개인의 삶이 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거네요. 그런 맥락에서 조직 바깥에서 스스로 만들어내시는 활동이나 프로젝트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친구와 함께 ‘추수작업실’이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 일과 놀이, 나와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삶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이 균형을 함께 가꿔가는 주간회고, 책모임 등을 하는 2인 커뮤니티예요. 도시 속 버려진 것, 쓸모를 다한 것들을 탐색하며 새로운 시선과 의미를 부여하는 사진 기반의 프로젝트, ‘어벡스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개인적 관심사로 프로젝트를 꾸렸지만 추진력 있게 치고 나가지는 못해서 약간의 부담을 안고 있어요. 2022년에는 좀 더 앞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운동도 저에게는 중요한 활동이에요.
운동을 중요한 활동으로 꼽으시는 게 독특해요.
20대 초반까지 6년간 복싱을 했고, 짧게 선수 생활도 했어요. 운동의 특성과 체육관 문화 때문에 복싱을 그만둔 뒤에는 요가를 배웠고요. 요가 강사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4주 워크숍을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아 수업을 꾸려본 경험도 있습니다.
복싱을 한 것이 끈기와 몰입의 한계를 최대치로 경험하는 시간이었을 듯해요. 이 시간이 민지 님께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제일 크게 배웠던 건, 걱정하고 있을 시간에 연습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걱정하고 있는다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걱정할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무언가를 해야 해요. 그래야 변화가 생기든, 다음 기회가 오든, 성과를 내든 할 수 있어요. 그것을 가장 크게 배웠어요.
이때 배운 사고방식이 저에게 중요한 게, 지금도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하게 돼요. 지금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자. 작고 사소한 거라도. 그런 마인드셋이 생긴 것 같아요.
인터뷰, 정리. 황효진 (뉴그라운드 공동 대표)
인터뷰어 효진의 코멘트
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에게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일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잡다한 업무'가 정말 정말 많으며, 내가 하는 일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 정도라고 여겨질 때도 있으니까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눈으로 확인 가능하거나 직관적으로 설명 가능한 역량이 아닐 때, 우리는 나에게 전문성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될 수 있는 판을 설계하고, 이끌어가는 역량은 아주 희귀하고 소중한 것 아닐까요? 민지 님이 첫 번째 커리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쌓고 있는 역량이 바로 이런 것이겠고요.
가고자 하는 방향(목표)을 설정하고, 거기에 필요한 판의 세부 요소를 설계하고, 그 판 위에서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는 활동이 일어나도록 촉진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미를 찾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일. 그러니까 민지 님은 커뮤니티를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심지어 조직 바깥에서 동료들과 추수작업실과 어벡스프로젝트를 꾸리신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 줄 아는 분이기도 하죠. 영역과 조직, 직무를 불문하고 사람을 모으고 협업해서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자리라면 민지 님께 잘 어울리는 곳일 거예요. 무엇을 하든 지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민지 님의 2022년에 큰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