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라는 뉴그라운드의 수식어는 저에게 꽤 오랫동안 고민의 대상이었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으로 이해되면 어쩌나, 이 단어 안에 꼭 생물학적 여성뿐 아니라(엄밀히 말하자면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것도 인위적인 구분이긴 합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이었거든요. 하지만 걱정만 하고 수식어를 바꾸거나 여성의 범주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방법을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뉴그라운드는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바깥에는 어느 정도 비즈니스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SNS 등에서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트랜스 여성을 '여성'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사람들)와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갈등을 보면서 다양한 정체성의 여성들을 포괄하는 커뮤니티를 다른 분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 모두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제가 찾은 핑계였던 것 같습니다. 커뮤니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러니 이건 논의도 논란의 대상도 아닌 그냥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에요. 그러던 와중, 이번 시즌에 처음 뉴그라운드에 가입한 주희 님이 체크아웃 시간에 저의 회고 문서를 보고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저도 궁금한 부분이었어요! 흔히 시스젠더 '여성' 모임에서 배제되는 젠더퀴어, 트랜스 여성, 인터섹스도 참여 가능한지, 포용되는 집단인지요."
주희 님의 이 코멘트가 너무 반갑고 감사했어요. 이제 드디어 뉴그라운드 안에서 이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구나, 그리고 더는 미루지 말고 해야만 하는구나 싶었거든요. 주희 님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더불어 궁금한 것들을 묻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주희 님의 일과 살아온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효진: 주희 님,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주희: 조금 피곤해서 회복하려고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일이 많아서 항상 피곤한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줄어도 피곤하더라고요. 제가 자체적으로 저 자신에게 가하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아요.
효진: 그게 어떤 건가요? 일하실 때의 완벽주의 성향 같은 건가요?
주희: 일 벌이는 걸 엄청나게 좋아해요. 어릴 때는 그렇게 일을 벌여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좀 들기도 했고 한의사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소모적이기도 해서 일을 하고 나면 남는 에너지가 별로 없어요. 벌여놓은 일들을 제가 원하는 만큼 다 못하는 거죠. '왜 못하지? 내가 시간 조절을 잘 못했나? 아니면 게을러서 그런가?' 하다가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 후로는 체력도 키우고 일도 줄이고, 생각하는 방식도 바꾸려고 노력 중이에요.
효진: 자기소개에 돌봄과 건강권, 질병권, 자본주의에 관심이 많다고 써주셨어요. 이런 관심을 안은 상태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셨는지, 아니면 일하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보게 되는 장면들로 인해 저 주제들에 관심을 두게 되셨는지 듣고 싶었어요.
주희: 원래 그런 주제들이 관심이 있어서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대학교 때도 활동가로 조금 일했고, 사회 복지 쪽 일도 했었는데 10여 년 전 미국에서는 돌봄 같은 게 부재했어요. 활동가들이 전부 번아웃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죠. 그래서 건강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한의학 쪽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효진: 신기하네요. 그런 관심이 한의사라는 일로 연결됐다는 사실이요.
주희: 제가 사회를 보는 관점이 한의학이 인간의 몸을 보는 관점과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의학을 하고 싶었어요. 사회 전체에 어떤 문제가 나타난다면 그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드러낸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빈곤이나 범죄 같은 문제들이 생길 때 그걸 없애거나 가두는 식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사회 전체를 고치거나, 더 좋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사회를 보려고 해요.
한의학도 몸을 그런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요. 예를 들어 환자가 오면 어디가 아프든 몸 전체를 다 보는 거죠. 그래서 한의학은 느릴 수밖에 없는 의학이고요. 하지만 실제로 일해보니 현장은 이론과 다르긴 하더라고요. (웃음)
효진: 일하시면서 '나 한의사 되길 잘한 것 같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주희: 가족을 치료해 줄 수 있을 때요. 할머니가 인지저하증이신데, 노인성 질환은 양방에서 별로 해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그냥 늙어서 그런 거예요'라고 하는 경우도 많고요. 할머니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증상들을 많이 경험하고 계셔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치료해 드리고, 좋아지시는 것을 보면서 한의사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효진: 본업과 더불어 영어 회화 사업도 하시잖아요.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주희: 한의사로서 일한 것보다 영어를 가르친 게 더 오래됐어요. 한의대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일을 했었고, 그러다가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원해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됐거든요. 그때 준비하는 과정에서 영어 학원에서 일하게 됐어요. 사실 제가 미국 교포인데,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할 수 있는 일 중 영어를 가르치는 게 가장 저랑 맞다고 생각해서 그쪽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효진: 어떤 언어나 기술을 내가 잘 쓰는 것과 타인에게 가르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은데요, 주희 님은 가르치는 일에도 잘 맞으시나 봐요.
주희: 네, 저는 교육을 되게 좋아해요.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교육에 어떤 모델들과 모습들이 있는지, 사람이 새로운 걸 접했을 때 어떤 순간에 깨달음이 있는지 등에 관심이 많아요.
효진: 주희 님이 여시는 영어 회화 수업 중에서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것들이 많잖아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진행하는 영어 회화 수업과는 다루는 텍스트들, 주제들이 다른 것 같아요.
주희: 표면적인 이유로는, 제가 관심 있는 것을 제일 잘 가르칠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어릴 때 미국에 갔었거든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 과정을 다 미국에서 나왔는데, 거기 살면서 제가 얻었던 것 중 가장 큰 게 이런 거예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이야기와 그들과의 교류에서 얻었던 지식들 같은 거요. 그런 게 저한테는 가장 소중해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효진: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하셨을 때 주희 님도 즐겁고, 참여하신 분들의 반응도 좋았는지 궁금해요.
주희: 일단 저는 주제가 무엇이냐보다는, 수강생분들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으면 좋아요. 그분들 사이에서 대화가 많이 오가면 제일 즐겁죠.
아무래도 반응이 좋았던 건 1월 수업인데요,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고(웃음) 그때 역사 강의를 하는 강사님과 함께 콜라보로 수업을 했었어요. 앞부분에서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영화 <엘리멘탈>을 함께 보면서 제가 추가적으로 미국 교포로서의 경험 등을 공유해드리고 영어 회화도 하고 그룹 액티비티도 했었죠. 그때 어떤 어린이가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어요. '우리 도시는 000을 배제한다' 혹은 '000을 염두에 두고 만든 도시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영어로 연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린이 수강생분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아이들을 배제한다'라는 문장을 쓰고 본인의 경험을 공유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수업에 들어와서 영어를 배우는 것도 좋지만, 참여하시는 분들이 다양한 관점을 얻어가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는데 그때가 딱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주희 님이 영어 회화 수업에서 진행했던 팔레스타인 특강 카드뉴스.
효진: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주희 님은 오랜 시간을 한국에서 떠나계셨는데,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적응하실 때는 괜찮으셨나요?
주희: 어릴 때도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에 꾸준히 왔다 갔다 했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건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성인이 돼서 한국에 왔더니, 한국은 소속된 집단 위주로 많이 돌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이런 식으로요. 그런 집단이 없으면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행사에 초대받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초반에는 그런 문화 때문에 조금 힘들었어요.
효진: 지금은 친구를 많이 사귀셨나요? 어떠세요?
주희: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닌데요(웃음), 친구들은 많은데 그런 관계와는 약간 다른 것 같아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는 '나 너무 한국 사람 같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나는 너무 한국 사람이어서 여기에 적응을 못 하는 건가?' 하는 느낌도 있었는데, 오히려 한국에 오니까 은근히 미국 사람 같은 부분 때문에 미국에서 대학을 함께 다녔던 교포 친구들이나 다른 유색인종 친구들과 느꼈던 유대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요. 미국에서 소수자로 살았던 경험이 저한테는 되게 큰 것이고, 제가 세계를 보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효진: 얼마 전 체크아웃 타임 때 제 회고에 달아주셨던 코멘트를 언급하고 싶어요. 제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라는 뉴그라운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주희 님이 "저도 궁금한 부분이었어요! 흔히 시스젠더 1 '여성' 모임에서 배제되는 젠더퀴어 2, 트랜스 여성 3, 인터섹스 4도 참여 가능한지, 포용되는 집단인지요"라는 댓글을 달아주셨죠. 저는 그 댓글이 너무 반가웠거든요.
주희: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라는 게 뉴그라운드에 오랫동안 가입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말씀을 드렸어요. 여성이라는 정체성 기반의 모임이 요즘 많은데, 그 여성이 제가 생각하는 여성과는 다를 때도 있어서 여쭤봤던 것 같아요. 모임이 외부적으로 어떻게 표현이 되는지도 중요할 텐데, 콘텐츠를 봤을 때도 트랜스 여성이 인터뷰이가 되거나 인스타그램에 젠더 관련 포스팅이 올라오거나 이러지는 않아서 '아, 그냥 시스젠더 여성들의 커뮤니티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여성이라는 단어를 쓸 때 대체로 젠더 퀴어, 트랜스여성, 인터섹스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 편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1. 시스젠더: 출생 시 지정된 성(性)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2. 젠더퀴어: 여성 혹은 남성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성별 체계와 시스젠더 규범성에서 벗어난 성별정체성 혹은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
3. 트랜스여성: 트랜스젠더는 좁은 의미로는 출생 시 지정된 성(性)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며, 넓은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젠더 규범과 기대에서 벗어나는 모든 종류의 변이를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트랜스젠더 남성(FTM)의 경우 지정성별은 여성이나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이며, 트랜스젠더 여성(MTF)의 경우 지정성별이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이다.
4. 인터섹스: 이분법적 성 개념으로 규정되기 어려운 성징을 타고나 전형적인 여성이나 남성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효진: 처음 커뮤니티를 만들 때는 '여성'이라는 단어가 누군가를 배제할 수 있다는 표현이라는 걸 잘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뉴그라운드의 '여성' 안에는 시스젠더 여성이 아닌 분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자세히 명시할 것인가가 요즘의 고민이에요. 아마 다음 시즌부터는 설명을 좀 바꾸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튼 저는 주희 님이 그런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했다고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주희: 그 과정을 워머스분들과 함께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젠더 주제의 모임을 열어서 이 주제에 관해 함께 이야기해 볼 기회를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커뮤니티에 있는 분들이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효진: 너무 좋은 아이디어예요. 주희 님은 하시는 일이 많은데, 스스로를 어떤 방법으로 돌보고 계시나요?
주희: 저를 돌보는 방법이 없어요. (웃음) 사실 애인이 엄청 잘 쉬는 타입이에요. 저는 오늘 일을 다 마치면 내일 일을 끌어다가 오늘 하는 스타일인데, 애인은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아니어서 도움이 돼요. 고양이들과도 함께 살고 있어서 종종 놀아주기도 하고요. 저 혼자 있을 때 좋아하는 건 소설 읽기예요. 비판적인 기사, 저널 같은 걸 읽다 보면 뇌가 터질 것 같아서 판타지 소설이나 SF 소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에요.
효진: 뉴그라운드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참여를 못 하셨죠?
주희: 맞아요, 근무 시간과 겹치는 때가 많았어요. 선유도 공원 모임도 좋아 보였고, 같이 모여서 브런치를 드시는 모임도 좋아 보여서 어떤 모임이든 열어주시면 가고 싶긴 해요.
효진: 화요일이 휴무라고 하셨죠? 기억하고 있다가 화요일에 모임을 열어볼게요.
주희: 네, 감사합니다. (웃음)
효진: 주희 님,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주희: 조금 피곤해서 회복하려고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일이 많아서 항상 피곤한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줄어도 피곤하더라고요. 제가 자체적으로 저 자신에게 가하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아요.
효진: 그게 어떤 건가요? 일하실 때의 완벽주의 성향 같은 건가요?
주희: 일 벌이는 걸 엄청나게 좋아해요. 어릴 때는 그렇게 일을 벌여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좀 들기도 했고 한의사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소모적이기도 해서 일을 하고 나면 남는 에너지가 별로 없어요. 벌여놓은 일들을 제가 원하는 만큼 다 못하는 거죠. '왜 못하지? 내가 시간 조절을 잘 못했나? 아니면 게을러서 그런가?' 하다가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 후로는 체력도 키우고 일도 줄이고, 생각하는 방식도 바꾸려고 노력 중이에요.
효진: 자기소개에 돌봄과 건강권, 질병권, 자본주의에 관심이 많다고 써주셨어요. 이런 관심을 안은 상태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셨는지, 아니면 일하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보게 되는 장면들로 인해 저 주제들에 관심을 두게 되셨는지 듣고 싶었어요.
주희: 원래 그런 주제들이 관심이 있어서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대학교 때도 활동가로 조금 일했고, 사회 복지 쪽 일도 했었는데 10여 년 전 미국에서는 돌봄 같은 게 부재했어요. 활동가들이 전부 번아웃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죠. 그래서 건강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한의학 쪽으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효진: 신기하네요. 그런 관심이 한의사라는 일로 연결됐다는 사실이요.
주희: 제가 사회를 보는 관점이 한의학이 인간의 몸을 보는 관점과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의학을 하고 싶었어요. 사회 전체에 어떤 문제가 나타난다면 그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드러낸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빈곤이나 범죄 같은 문제들이 생길 때 그걸 없애거나 가두는 식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사회 전체를 고치거나, 더 좋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사회를 보려고 해요.
한의학도 몸을 그런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요. 예를 들어 환자가 오면 어디가 아프든 몸 전체를 다 보는 거죠. 그래서 한의학은 느릴 수밖에 없는 의학이고요. 하지만 실제로 일해보니 현장은 이론과 다르긴 하더라고요. (웃음)
효진: 일하시면서 '나 한의사 되길 잘한 것 같다'라고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주희: 가족을 치료해 줄 수 있을 때요. 할머니가 인지저하증이신데, 노인성 질환은 양방에서 별로 해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그냥 늙어서 그런 거예요'라고 하는 경우도 많고요. 할머니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증상들을 많이 경험하고 계셔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치료해 드리고, 좋아지시는 것을 보면서 한의사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효진: 본업과 더불어 영어 회화 사업도 하시잖아요.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주희: 한의사로서 일한 것보다 영어를 가르친 게 더 오래됐어요. 한의대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일을 했었고, 그러다가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원해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됐거든요. 그때 준비하는 과정에서 영어 학원에서 일하게 됐어요. 사실 제가 미국 교포인데,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할 수 있는 일 중 영어를 가르치는 게 가장 저랑 맞다고 생각해서 그쪽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효진: 어떤 언어나 기술을 내가 잘 쓰는 것과 타인에게 가르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은데요, 주희 님은 가르치는 일에도 잘 맞으시나 봐요.
주희: 네, 저는 교육을 되게 좋아해요.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교육에 어떤 모델들과 모습들이 있는지, 사람이 새로운 걸 접했을 때 어떤 순간에 깨달음이 있는지 등에 관심이 많아요.
효진: 주희 님이 여시는 영어 회화 수업 중에서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것들이 많잖아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진행하는 영어 회화 수업과는 다루는 텍스트들, 주제들이 다른 것 같아요.
주희: 표면적인 이유로는, 제가 관심 있는 것을 제일 잘 가르칠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어릴 때 미국에 갔었거든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 과정을 다 미국에서 나왔는데, 거기 살면서 제가 얻었던 것 중 가장 큰 게 이런 거예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이야기와 그들과의 교류에서 얻었던 지식들 같은 거요. 그런 게 저한테는 가장 소중해서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효진: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하셨을 때 주희 님도 즐겁고, 참여하신 분들의 반응도 좋았는지 궁금해요.
주희: 일단 저는 주제가 무엇이냐보다는, 수강생분들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으면 좋아요. 그분들 사이에서 대화가 많이 오가면 제일 즐겁죠.
아무래도 반응이 좋았던 건 1월 수업인데요,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고(웃음) 그때 역사 강의를 하는 강사님과 함께 콜라보로 수업을 했었어요. 앞부분에서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영화 <엘리멘탈>을 함께 보면서 제가 추가적으로 미국 교포로서의 경험 등을 공유해드리고 영어 회화도 하고 그룹 액티비티도 했었죠. 그때 어떤 어린이가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어요. '우리 도시는 000을 배제한다' 혹은 '000을 염두에 두고 만든 도시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영어로 연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린이 수강생분이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아이들을 배제한다'라는 문장을 쓰고 본인의 경험을 공유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수업에 들어와서 영어를 배우는 것도 좋지만, 참여하시는 분들이 다양한 관점을 얻어가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는데 그때가 딱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주희 님이 영어 회화 수업에서 진행했던 팔레스타인 특강 카드뉴스.
효진: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주희 님은 오랜 시간을 한국에서 떠나계셨는데,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적응하실 때는 괜찮으셨나요?
주희: 어릴 때도 비자 문제 때문에 한국에 꾸준히 왔다 갔다 했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건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성인이 돼서 한국에 왔더니, 한국은 소속된 집단 위주로 많이 돌아가는 것 같더라고요.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동아리 친구 이런 식으로요. 그런 집단이 없으면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행사에 초대받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초반에는 그런 문화 때문에 조금 힘들었어요.
효진: 지금은 친구를 많이 사귀셨나요? 어떠세요?
주희: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닌데요(웃음), 친구들은 많은데 그런 관계와는 약간 다른 것 같아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는 '나 너무 한국 사람 같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나는 너무 한국 사람이어서 여기에 적응을 못 하는 건가?' 하는 느낌도 있었는데, 오히려 한국에 오니까 은근히 미국 사람 같은 부분 때문에 미국에서 대학을 함께 다녔던 교포 친구들이나 다른 유색인종 친구들과 느꼈던 유대감을 느끼기가 어려워요. 미국에서 소수자로 살았던 경험이 저한테는 되게 큰 것이고, 제가 세계를 보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효진: 얼마 전 체크아웃 타임 때 제 회고에 달아주셨던 코멘트를 언급하고 싶어요. 제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라는 뉴그라운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는데, 주희 님이 "저도 궁금한 부분이었어요! 흔히 시스젠더 1 '여성' 모임에서 배제되는 젠더퀴어 2, 트랜스 여성 3, 인터섹스 4도 참여 가능한지, 포용되는 집단인지요"라는 댓글을 달아주셨죠. 저는 그 댓글이 너무 반가웠거든요.
주희: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라는 게 뉴그라운드에 오랫동안 가입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말씀을 드렸어요. 여성이라는 정체성 기반의 모임이 요즘 많은데, 그 여성이 제가 생각하는 여성과는 다를 때도 있어서 여쭤봤던 것 같아요. 모임이 외부적으로 어떻게 표현이 되는지도 중요할 텐데, 콘텐츠를 봤을 때도 트랜스 여성이 인터뷰이가 되거나 인스타그램에 젠더 관련 포스팅이 올라오거나 이러지는 않아서 '아, 그냥 시스젠더 여성들의 커뮤니티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여성이라는 단어를 쓸 때 대체로 젠더 퀴어, 트랜스여성, 인터섹스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 편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1. 시스젠더: 출생 시 지정된 성(性)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2. 젠더퀴어: 여성 혹은 남성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성별 체계와 시스젠더 규범성에서 벗어난 성별정체성 혹은 그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
3. 트랜스여성: 트랜스젠더는 좁은 의미로는 출생 시 지정된 성(性)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며, 넓은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젠더 규범과 기대에서 벗어나는 모든 종류의 변이를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트랜스젠더 남성(FTM)의 경우 지정성별은 여성이나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이며, 트랜스젠더 여성(MTF)의 경우 지정성별이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이다.
4. 인터섹스: 이분법적 성 개념으로 규정되기 어려운 성징을 타고나 전형적인 여성이나 남성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효진: 처음 커뮤니티를 만들 때는 '여성'이라는 단어가 누군가를 배제할 수 있다는 표현이라는 걸 잘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뉴그라운드의 '여성' 안에는 시스젠더 여성이 아닌 분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자세히 명시할 것인가가 요즘의 고민이에요. 아마 다음 시즌부터는 설명을 좀 바꾸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튼 저는 주희 님이 그런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했다고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주희: 그 과정을 워머스분들과 함께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젠더 주제의 모임을 열어서 이 주제에 관해 함께 이야기해 볼 기회를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커뮤니티에 있는 분들이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효진: 너무 좋은 아이디어예요. 주희 님은 하시는 일이 많은데, 스스로를 어떤 방법으로 돌보고 계시나요?
주희: 저를 돌보는 방법이 없어요. (웃음) 사실 애인이 엄청 잘 쉬는 타입이에요. 저는 오늘 일을 다 마치면 내일 일을 끌어다가 오늘 하는 스타일인데, 애인은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아니어서 도움이 돼요. 고양이들과도 함께 살고 있어서 종종 놀아주기도 하고요. 저 혼자 있을 때 좋아하는 건 소설 읽기예요. 비판적인 기사, 저널 같은 걸 읽다 보면 뇌가 터질 것 같아서 판타지 소설이나 SF 소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에요.
효진: 뉴그라운드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참여를 못 하셨죠?
주희: 맞아요, 근무 시간과 겹치는 때가 많았어요. 선유도 공원 모임도 좋아 보였고, 같이 모여서 브런치를 드시는 모임도 좋아 보여서 어떤 모임이든 열어주시면 가고 싶긴 해요.
효진: 화요일이 휴무라고 하셨죠? 기억하고 있다가 화요일에 모임을 열어볼게요.
주희: 네, 감사합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