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같은 질문에 빠집니다. 내가 이 일을 왜 시작했더라? 이 일로 뭘 이루고 싶지? 여전히 답을 내리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지만, 제가 뉴그라운드를 직접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에요. 제가 원하는 가치관과 방향성을 담은 일을, 저에게 맞는 방식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워머스 이슬기 님도 저처럼 혼자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분입니다. 슬기 님은 '페어티'라는 티팬티 브랜드를 만들고 있어요. 슬기 님의 상황을 알게 된 이후 저는 엄청난 내적 친밀감을 느꼈었는데요, 동시에 많은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왜 페어티를 만들게 됐는지, 혼자 일하는 게 어렵지는 않은지,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생각과 고민들을 슬기 님과 나누고 싶어서,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 이진실
효진: 원래 페어티를 혼자 운영하신 게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슬기: 네, 2022년 5월부터 저까지 총 세 명이 함께 시작했다가 2023년 7월 28일에 저 혼자 개인사업자를 내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좀 있었고요.
효진: 저도 동료와 함께 뉴그라운드를 만들다가 혼자 운영하게 됐는데, 슬기 님도 비슷한 케이스잖아요. 혼자 운영을 해보니 이전과 뭐가 제일 다른 것 같으세요?
슬기: 동료들과 일할 때는 역할 분담이 확실했어요. 내 업무를 파악하기가 쉬워서 일하기도 용이했죠. 셋 다 엄청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편이어서 좋았고요. 페어티를 혼자 운영하면서부터는 전체적인 과정을 제가 다 봐야 한다는 게 이전과 제일 다른 점이에요. 저는 제가 리더보다 서포터의 역할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리더로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하고,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분께 업무를 요청하거나 피드백을 드리는 일도 해야 하니 그 부분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덜 후회할 방향을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의 가치관이 담긴 회사는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효진: 혼자 페어티를 운영해야 할 상황이 됐을 때 분명히 다른 선택지도 고민하셨을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슬기 님도 페어티를 그만두고 사업을 접는 방법이 있었을 테고요.
슬기: 저 진짜 바로 ‘원티드’에 들어갔어요.(웃음) 페어티를 만들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진짜 연락을 해야 하나, 그러면 너무 염치가 없나, 이런 고민도 했고요. 거의 두 달 정도 페어티 일을 방치했어요. 고객 문의가 들어오면 잠깐 받는 정도만 한 거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덜 후회할 방향을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의 가치관이 담긴 회사는 제가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한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 적이 있어요. 솔직히 내가 혼자 페어티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100%의 자신이 없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그 친구도 약간 걱정했대요. 그래서 저를 같이 아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이 모두 슬기한테 너무 잘된 일 아니냐고, 슬기가 혼자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건데 축하해줘야지 왜 걱정을 하냐고 했대요.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이제 의심 없이 가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효진: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게 힘이 많이 되죠. 나는 안 해본 일이니까 긴가민가해도, 저 사람들이 저렇게 생각한다면 나한테 잘할 수 있는 이유가 있겠거니,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슬기 님은 페어티를 운영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슬기: 쇼핑몰에서 스포츠웨어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다음에는 패션 스타트업에서 패션 에디터로 인턴을 하다가, 가족이 의료사고를 겪으면서 법률에 관심이 생겨 법률 스타트업에 마케터로 들어가게 됐고요. 거기서 3년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로펌에서 콘텐츠 관련 일을 또 했어요.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는 식품 IT 스타트업이었네요. 거기서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Marketing) 마케터로 1년 좀 넘게 일했어요.
효진: 해오신 일들이 엄청 다양하고 흥미롭네요. 언젠가 창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셨었나요?
슬기: 전혀 생각한 적이 없어요. 사실 저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다가 잘 안돼서 집 사정이 많이 어려워진 적이 있거든요. 제가 세 자매 중 첫째인데, 저희 자매의 인생 모토가 '절대 사업하지 말자'예요. 이상형은 '사업하지 않는 사람'이었고요. (웃음) '우리 집에서 절대 사업은 없다'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회사를 만들지 않는 이상은 내가 원하는 가치관이나 방향성과 100% 일치하는 회사에 다니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냥 엄마랑 반찬가게라도 내는 그런 창업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상상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사이드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이렇게 창업까지 이어졌네요.
페어티 캐릭터 탄생 비하인드를 담은 페어티 인스타그램 게시물
효진: 막상 창업을 해보니 어떠셨어요?
슬기: 페어티를 만든 초반에 성과가 좋았을 때는 '우리 능력 있나 보다' 이러면서 창업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업에서 제일 힘든 게 예측불가능함이잖아요. 뭐든지 예측이 안 되다 보니 실수도 잦았고, 위기도 많이 왔어요. 그럴 때는 '그냥 사이드 프로젝트로만 할 걸', '그냥 회사에 다니면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을걸'이라는 후회도 했던 것 같아요.
효진: 창업하길 잘했다고 느끼실 때도 있나요?
슬기: 예전에도 지금도, 일에 대한 동기가 떨어질 때는 무조건 고객 후기를 봐요. 고객분들이 써주신 후기나 고객 인터뷰했던 내용을 다시 보면 '내가 이래서 이 일을 하려고 했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력이 많이 돼요.
페어티 초반에는 전화로 고객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그때 페어티의 '찐팬' 분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분들의 공통점은 페어티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가, 저희를 보고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한 고객분께 '저희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그분의 친구분이 텀블벅에 올라온 페어티 펀딩 링크를 보내면서 '감히 텀블벅에 이런 게 올라왔다'라고 욕을 했었대요. 그래서 그분도 페어티 펀딩 페이지에 들어가서 내용을 읽어봤는데, 예상과 좀 다른 것 같아서 궁금증에 제품을 사봤고 만족하셨다고 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 인터뷰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효진: 판매하시는 상품이 티팬티고, 한국에서는 아직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아이템이 아니잖아요. 페어티가 이 제품을 어떻게 소개하고 판매할 것인가에 관해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슬기: 티팬티가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속옷이라는 오해와 편견이 있어요. 실제로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그래서 일단은, 티팬티도 그냥 일반적인 속옷이라는 사실을 엄청 강조하고 싶었어요. '일반적인'이라는 표현도 약간 자의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많은 일반 속옷 회사들을 참고하면서 우리도 이렇게 자리 잡아야겠다고 판단했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목표가 '야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였어요. 제품 착용샷을 셀프로 촬영했는데 그때마다 감독관을 한 명씩 뒀거든요. 포즈가 조금이라도 섹시해 보이거나 야하게 보이면 경고하는 역할을 준 거죠. (웃음)
제가 혼자 페어티를 운영하게 된 이후로는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아직도 답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보통의 다른 속옷 회사들 같은 방향으로 가고 싶나?'라고 자문해 봤을 때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티팬티만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라는 특징은 계속 이어가고 싶은데, 거기에 좀 재미있고 웃기고 친구들끼리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브랜드가 되면 좋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여성을 위한 안전한 속옷 제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고,
그렇다면 페미니즘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효진: 페어티 블로그에 올리시는 콘텐츠들을 보면 진짜 재미있더라고요. 티팬티라고 하면 저에게도 아직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페어티라는 브랜드는 재미있어서 일단 너무 좋아요.
슬기: 혼자 페어티를 운영하기 시작할 때 방향성을 고민하다가 '내가 너무 어렵게 접근하고 있나?' 싶어서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메모장에 나열해 봤어요. 공통점은 '반전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더라고요. 그리고 다들 웃긴 걸 좋아했고요. 페어티도 '얘네 의외로 웃기고 재미있네?'라는 인상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저는 선 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라, 선을 넘지 않는 안전한 웃음을 주는 방향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효진: 이런 고민도 있으신지 궁금해요. 저는 여성 커뮤니티를 만드는 입장이다 보니 페미니즘에 관해 책도 더 많이 읽고, 공부도 해서 이 일을 하면서 적어도 헛소리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페어티의 상품을 주로 구매하시는 분들도 여성들일 거고, 또 속옷 사업이다 보니 젠더 감수성에서만큼은 뒤떨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책임감이나 경각심이 슬기 님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슬기: 너무너무 공감해요. 뉴그라운드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젠더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제가 너무 하나하나에 예민하다 보니 항상 태클 거는 사람이 되었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 공부가 제대로 안 되어있다 보니 동료들을 설득하기도 어렵고, '내가 너무 트집을 잡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데, 예전에 ‘하체 비만인 사람에게 (티팬티가) 좋다’라는 뉘앙스로 광고를 만든 적이 있어요. 최종적으로는 문구를 조금 바꾸긴 했지만요. 이 건으로 동료들과 논쟁을 하면서 이 말을 쓰면 왜 안되는지를 설명하거나, 근거를 제시하기가 힘들었어요. 나는 여성을 위한 안전한 속옷 제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고, 이게 절대 성 상품화와 연결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들었어요.
효진: 공부라는 부분 외에, 이 커뮤니티가 슬기 님께 도움이나 힘이 되는 건 언제인 것 같으세요?
슬기: 좀 신기한 건, 뉴그라운드에 처음 가입했을 때는 제가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슬랙에 올라오는 글을 읽기만 해도 뭔가 편안했고, 연대감이 느껴졌어요. 그다음부터는 저도 글을 올리고 고민도 썼는데 그러다 보니 혼자 일할 때의 막막함이나 외로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부분들에 대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안전한 커뮤니티라는 생각이 드니까 연대감이 짙어지는 것 같아요.
효진: 다행이에요. (웃음) 저는 뉴그라운드를 즐겁게 운영하고 있지만 가끔 ‘내가 뭘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지?’ ‘결국 이걸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뭐지?’라고 고민하다 보면 이 일을 내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라는 생각에 빠지거든요. 슬기 님은 어떠신지 궁금해요. 페어티를 계속 운영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나 목표가 있으세요?
슬기: '이유를 모르겠는데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저의 동력이에요. 얼마 전에 제가 언더독스에서 함께 강의를 듣고 있는 분들께 ‘페어티가 해외 수출을 처음으로 앞두고 있는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고민이다’라는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어요. 어떤 대표님께서 해외 수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게 있다면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걸 읽고 제가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제가 모르는 게 많다 보니 다음에 모르는 게 생기면 조심스럽게 메일이나 카톡 한 번 드릴게요’라고 답장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슬기 님, 조심스럽게 안 하셔도 돼요. 그냥 도움을 요청하셔도 돼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페어티에서 디자이너로 함께 일하는 분도 제 친구의 친구인데, 충분한 보수를 드리고 싶지만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협의를 하고 협업하는 중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항상 의지가 되어주시고 페어티를 같이 잘 만들어가길 원하는 분이라 그게 너무 고맙고 신기해요.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지치면 안 되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
© 이진실
효진: 원래 페어티를 혼자 운영하신 게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슬기: 네, 2022년 5월부터 저까지 총 세 명이 함께 시작했다가 2023년 7월 28일에 저 혼자 개인사업자를 내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좀 있었고요.
효진: 저도 동료와 함께 뉴그라운드를 만들다가 혼자 운영하게 됐는데, 슬기 님도 비슷한 케이스잖아요. 혼자 운영을 해보니 이전과 뭐가 제일 다른 것 같으세요?
슬기: 동료들과 일할 때는 역할 분담이 확실했어요. 내 업무를 파악하기가 쉬워서 일하기도 용이했죠. 셋 다 엄청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편이어서 좋았고요. 페어티를 혼자 운영하면서부터는 전체적인 과정을 제가 다 봐야 한다는 게 이전과 제일 다른 점이에요. 저는 제가 리더보다 서포터의 역할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리더로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하고,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분께 업무를 요청하거나 피드백을 드리는 일도 해야 하니 그 부분이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덜 후회할 방향을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의 가치관이 담긴 회사는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효진: 혼자 페어티를 운영해야 할 상황이 됐을 때 분명히 다른 선택지도 고민하셨을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슬기 님도 페어티를 그만두고 사업을 접는 방법이 있었을 테고요.
슬기: 저 진짜 바로 ‘원티드’에 들어갔어요.(웃음) 페어티를 만들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진짜 연락을 해야 하나, 그러면 너무 염치가 없나, 이런 고민도 했고요. 거의 두 달 정도 페어티 일을 방치했어요. 고객 문의가 들어오면 잠깐 받는 정도만 한 거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덜 후회할 방향을 선택하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의 가치관이 담긴 회사는 제가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한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 적이 있어요. 솔직히 내가 혼자 페어티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100%의 자신이 없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그 친구도 약간 걱정했대요. 그래서 저를 같이 아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이 모두 슬기한테 너무 잘된 일 아니냐고, 슬기가 혼자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건데 축하해줘야지 왜 걱정을 하냐고 했대요.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이제 의심 없이 가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효진: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게 힘이 많이 되죠. 나는 안 해본 일이니까 긴가민가해도, 저 사람들이 저렇게 생각한다면 나한테 잘할 수 있는 이유가 있겠거니,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슬기 님은 페어티를 운영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슬기: 쇼핑몰에서 스포츠웨어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다음에는 패션 스타트업에서 패션 에디터로 인턴을 하다가, 가족이 의료사고를 겪으면서 법률에 관심이 생겨 법률 스타트업에 마케터로 들어가게 됐고요. 거기서 3년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로펌에서 콘텐츠 관련 일을 또 했어요.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는 식품 IT 스타트업이었네요. 거기서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Marketing) 마케터로 1년 좀 넘게 일했어요.
효진: 해오신 일들이 엄청 다양하고 흥미롭네요. 언젠가 창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셨었나요?
슬기: 전혀 생각한 적이 없어요. 사실 저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다가 잘 안돼서 집 사정이 많이 어려워진 적이 있거든요. 제가 세 자매 중 첫째인데, 저희 자매의 인생 모토가 '절대 사업하지 말자'예요. 이상형은 '사업하지 않는 사람'이었고요. (웃음) '우리 집에서 절대 사업은 없다'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회사를 만들지 않는 이상은 내가 원하는 가치관이나 방향성과 100% 일치하는 회사에 다니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냥 엄마랑 반찬가게라도 내는 그런 창업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상상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사이드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이렇게 창업까지 이어졌네요.
페어티 캐릭터 탄생 비하인드를 담은 페어티 인스타그램 게시물
효진: 막상 창업을 해보니 어떠셨어요?
슬기: 페어티를 만든 초반에 성과가 좋았을 때는 '우리 능력 있나 보다' 이러면서 창업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업에서 제일 힘든 게 예측불가능함이잖아요. 뭐든지 예측이 안 되다 보니 실수도 잦았고, 위기도 많이 왔어요. 그럴 때는 '그냥 사이드 프로젝트로만 할 걸', '그냥 회사에 다니면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을걸'이라는 후회도 했던 것 같아요.
효진: 창업하길 잘했다고 느끼실 때도 있나요?
슬기: 예전에도 지금도, 일에 대한 동기가 떨어질 때는 무조건 고객 후기를 봐요. 고객분들이 써주신 후기나 고객 인터뷰했던 내용을 다시 보면 '내가 이래서 이 일을 하려고 했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력이 많이 돼요.
페어티 초반에는 전화로 고객 인터뷰를 많이 했어요. 그때 페어티의 '찐팬' 분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분들의 공통점은 페어티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가, 저희를 보고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한 고객분께 '저희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그분의 친구분이 텀블벅에 올라온 페어티 펀딩 링크를 보내면서 '감히 텀블벅에 이런 게 올라왔다'라고 욕을 했었대요. 그래서 그분도 페어티 펀딩 페이지에 들어가서 내용을 읽어봤는데, 예상과 좀 다른 것 같아서 궁금증에 제품을 사봤고 만족하셨다고 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 인터뷰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효진: 판매하시는 상품이 티팬티고, 한국에서는 아직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아이템이 아니잖아요. 페어티가 이 제품을 어떻게 소개하고 판매할 것인가에 관해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슬기: 티팬티가 성 상품화를 부추기는 속옷이라는 오해와 편견이 있어요. 실제로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그래서 일단은, 티팬티도 그냥 일반적인 속옷이라는 사실을 엄청 강조하고 싶었어요. '일반적인'이라는 표현도 약간 자의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많은 일반 속옷 회사들을 참고하면서 우리도 이렇게 자리 잡아야겠다고 판단했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목표가 '야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였어요. 제품 착용샷을 셀프로 촬영했는데 그때마다 감독관을 한 명씩 뒀거든요. 포즈가 조금이라도 섹시해 보이거나 야하게 보이면 경고하는 역할을 준 거죠. (웃음)
제가 혼자 페어티를 운영하게 된 이후로는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아직도 답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보통의 다른 속옷 회사들 같은 방향으로 가고 싶나?'라고 자문해 봤을 때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티팬티만 전문으로 하는 브랜드라는 특징은 계속 이어가고 싶은데, 거기에 좀 재미있고 웃기고 친구들끼리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브랜드가 되면 좋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여성을 위한 안전한 속옷 제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고,
그렇다면 페미니즘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효진: 페어티 블로그에 올리시는 콘텐츠들을 보면 진짜 재미있더라고요. 티팬티라고 하면 저에게도 아직은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페어티라는 브랜드는 재미있어서 일단 너무 좋아요.
슬기: 혼자 페어티를 운영하기 시작할 때 방향성을 고민하다가 '내가 너무 어렵게 접근하고 있나?' 싶어서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메모장에 나열해 봤어요. 공통점은 '반전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더라고요. 그리고 다들 웃긴 걸 좋아했고요. 페어티도 '얘네 의외로 웃기고 재미있네?'라는 인상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저는 선 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라, 선을 넘지 않는 안전한 웃음을 주는 방향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효진: 이런 고민도 있으신지 궁금해요. 저는 여성 커뮤니티를 만드는 입장이다 보니 페미니즘에 관해 책도 더 많이 읽고, 공부도 해서 이 일을 하면서 적어도 헛소리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페어티의 상품을 주로 구매하시는 분들도 여성들일 거고, 또 속옷 사업이다 보니 젠더 감수성에서만큼은 뒤떨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책임감이나 경각심이 슬기 님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슬기: 너무너무 공감해요. 뉴그라운드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젠더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제가 너무 하나하나에 예민하다 보니 항상 태클 거는 사람이 되었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 공부가 제대로 안 되어있다 보니 동료들을 설득하기도 어렵고, '내가 너무 트집을 잡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데, 예전에 ‘하체 비만인 사람에게 (티팬티가) 좋다’라는 뉘앙스로 광고를 만든 적이 있어요. 최종적으로는 문구를 조금 바꾸긴 했지만요. 이 건으로 동료들과 논쟁을 하면서 이 말을 쓰면 왜 안되는지를 설명하거나, 근거를 제시하기가 힘들었어요. 나는 여성을 위한 안전한 속옷 제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고, 이게 절대 성 상품화와 연결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들었어요.
효진: 공부라는 부분 외에, 이 커뮤니티가 슬기 님께 도움이나 힘이 되는 건 언제인 것 같으세요?
슬기: 좀 신기한 건, 뉴그라운드에 처음 가입했을 때는 제가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슬랙에 올라오는 글을 읽기만 해도 뭔가 편안했고, 연대감이 느껴졌어요. 그다음부터는 저도 글을 올리고 고민도 썼는데 그러다 보니 혼자 일할 때의 막막함이나 외로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부분들에 대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안전한 커뮤니티라는 생각이 드니까 연대감이 짙어지는 것 같아요.
효진: 다행이에요. (웃음) 저는 뉴그라운드를 즐겁게 운영하고 있지만 가끔 ‘내가 뭘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지?’ ‘결국 이걸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뭐지?’라고 고민하다 보면 이 일을 내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라는 생각에 빠지거든요. 슬기 님은 어떠신지 궁금해요. 페어티를 계속 운영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나 목표가 있으세요?
슬기: '이유를 모르겠는데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저의 동력이에요. 얼마 전에 제가 언더독스에서 함께 강의를 듣고 있는 분들께 ‘페어티가 해외 수출을 처음으로 앞두고 있는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고민이다’라는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어요. 어떤 대표님께서 해외 수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게 있다면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걸 읽고 제가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서 ‘제가 모르는 게 많다 보니 다음에 모르는 게 생기면 조심스럽게 메일이나 카톡 한 번 드릴게요’라고 답장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슬기 님, 조심스럽게 안 하셔도 돼요. 그냥 도움을 요청하셔도 돼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페어티에서 디자이너로 함께 일하는 분도 제 친구의 친구인데, 충분한 보수를 드리고 싶지만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협의를 하고 협업하는 중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항상 의지가 되어주시고 페어티를 같이 잘 만들어가길 원하는 분이라 그게 너무 고맙고 신기해요.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지치면 안 되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