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회사 안팎에서 기획하는 사람, 정재민 "일에서 아주 작은 나만의 시도를 해보면 좋겠어요"



정재민 님의 일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기획'입니다. 회사 안에서는 탄탄한 논리 구조를 쌓아 올려 사업을 기획하고, 회사 바깥에서는 자신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글 기반의 콘텐츠를 기획합니다. 비슷한 업무를 반복하더라도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목표에 가 닿기 위한 일의 과정을 기획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새로운 일에 대해서도 '일단 하자'라는 마음을 갖고, 하다 보면 '괜찮게 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정재민 님은 분명, 어떤 일에서든 자신만의 방법과 경로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 이 인터뷰는 뉴그라운드의 일대일 인터뷰 프로그램을 통해 정리된 결과물입니다. 





재민 님,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사회복지 분야의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금 조직에 입사한 지는 6년이 되었고, 이전에는 같은 팀에서 기존 사업을 관리 또는 지속하는 업무를 하거나 지역모금팀에서 담당 지역의 지자체와 협력해서 진행하는 모금 및 배분 사업을 담당했어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쉽게 표현하자면, 기부된 기부금을 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직접 사업을 기획하고요. 기획안에 쓸 기사나 연구 자료를 찾고, 핵심 내용을 정리하고, 이 사업을 해야만 하는 논리 구조를 만들어요. 이렇게 사업을 기획하는 일을 한 지는 2년이 되어가는데, 같은 업무를 연속적으로 한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같은 일을 해도 이전보다는 조금 수월하게 하는 저 자신이 신기했답니다. 


재민 님이 일하시는 팀에서 ‘사업을 기획한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궁금해졌어요.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나요?

어떤 복지 이슈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사업의 필요성을 충분히 갖춘 다음 예산 규모에 맞춰 몇 개 기관에게 지원할 수 있을지 예상해요.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어떤 내용을 우리가 지원할 수 있는지 범위를 정합니다. 그 다음 실제로 이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들이 우리 지역에 어느 정도 있는지 파악해요. 사업을 실제로 할 때 어떤 서류를 쓸지 정하는 것까지가 사업 기획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기획을 한 이후 위원회 심의를 받아서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죠.


다양한 위치에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주 중요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업무 파트너들의 연령대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달리해요. 연령대가 비교적 낮은 분들은 명확하고 짧게 이야기해야 잘 이해하시고, 높은 분들은 예시를 곁들여서 길게 설명해야 잘 이해하시더라고요. 교수나 큰 기관의 이사장, 대표급과는 메일로 길게 소통하는데, 두괄식으로 이 메일의 핵심이 무엇인지, 어떤 부분을 주로 봐주길 부탁드리는지 근거를 달아둬요. 이메일 소통을 어려워하시는 분이라면 전화로 설명해 드리고요. 공무원들과는 다급하게 소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전화를 사용합니다. 


자원을 잘 분배하고,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원활하게 소통이 일어나게끔 한다는 점에서 재민 님의 일은 퍼실리테이터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어요.

모금기관에서 직접 모금을 하거나, 복지관에서 이용자들과 만나는 플레이어 역할이 저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이 조직에 들어왔어요.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이런 일들을 경험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저의 성향과 맞지 않더라고요. 첫 직장에서 길거리 모금을 담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현장에서 정서적인 스킨십이 많은 일을 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사업 기획안을 작성할 때 이 사업이 왜 필요한지
근거를 갖추고 논리 구조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요."


그럼 지금 하시는 업무 중 가장 좋아하거나 자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것과 자신 있는 게 일치해요. 어쨌거나 모금된 돈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부자나 일반 시민의 공감을 사는 게 중요하거든요.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업의 필요성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서 저는 사업 기획안을 작성할 때 이 사업이 왜 필요한지 근거를 갖추고 논리 구조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요. 제가 구글링을 잘하거든요. 기획에 필요한 통계자료들을 잘 찾아요. 키워드 중심으로 검색해서 관련된 문헌을 찾고, 거기 쓰인 통계 자료를 확인한 후 자료의 제목 그대로 다시 검색해서 다운로드받는 거죠. 


간혹 논리가 부족하거나, 논리는 없지만 조직의 필요에 따라 해야만 하는 기획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논리 구조를 만드나요?

제가 하는 일을 중심으로 설명해 볼게요. 만약 독거노인 문제라고 하면, 전국 통계를 보고 경기도의 통계를 확인해봐요. 경기도 지자체에 관련 사업과 조례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럼에도 어떤 한계가 있는지 분석하면서 ‘이런 한계점에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기존 사업에서는 이런 대상만 다뤘는데, 찾아보니 이런 사각지대가 있다'라는 논리인 거죠. 그 과정에서 관련 현장에 직접 연락을 해 ‘우리가 이런 기획을 하려고 하는데 현장에서 느끼는 사각지대는 어디인 것 같냐'를 물어보거나 설문조사를 하기도 해요. 우리가 최대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을 찾아서 다른 사업과의 특화점을 만들려는 편입니다. 

자료를 조사하고 정리해서 사업의 필요성을 만들어 놓으면, 기획안을 읽으면서 ‘읽는 사람이 여기에 설득되겠는데?’라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쾌감이 느껴져요. 물론 기본적으로 회사 일은 힘들지만요.


재민 님만의 업무 방식이 정착된 것 같네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해를 거듭하며 연속으로 같은 업무를 하는 게 처음이에요. 처음 이 팀에서 업무를 시작할 때 시행착오를 정말 많이 겪었거든요. 그런데 같은 사업을 두 번 진행하고, 다른 사업도 연이어서 하다 보니 절차가 비슷하더라고요. 효율적으로 일하고 싶어서 방법을 조금씩 비틀었어요. 


예를 들면요?

사업을 심사하는 위원들에게 나가는 안내문이 따로 있는데, 문구를 딱 하나만 더 넣으면 일이 조금 더 효율적으로 흘러가요. ‘이런 사항이 있으니 미리 참고해주세요' 등의 문구죠. 그리고 저희가 관리하는 수행기관이 많거든요. 경기도가 크기 때문에 사업을 한번 진행할 때마다 몇십 개 기관에 연락해야 해요. 가령 수정사업계획서를 받아야 하는데 기관에서 마감 기간 안에 제출을 못 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마감 며칠 전에 ‘내일이 마감입니다'라고 문자를 돌리면 놓치지 않을 수 있고요. 

일하면서 노하우가 하나씩 생기는데, 이런 걸 함께 일하는 후배 직원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해요. 심사위원에게 안내 메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예시로 보여 준다거나, 안내 양식을 공유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렇게 해봤더니 편하더라" 하고 이야기하는 정도죠. 제가 신입 때 맨땅에 헤딩하면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후배 직원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일에서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하다 보면 그게 업무 능력이 되고,
'내가 이걸 잘하는구나'라는 사실도 알게 돼요."


후배 직원들, 혹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회초년생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까요?

일에서 아주 작은 나만의 시도를 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사회초년생이면 보통 선배들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게 되잖아요. 기획안이나 문서를 복사 후 붙여넣기 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자신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능력을 발견할 기회를 늦추는 거죠. 저도 일을 시작하고 초반 3년간은 거의 ‘복붙'으로 일했거든요. 최근에서야 업무 절차 속에서 나만의 과정을 하나 추가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일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됐어요. 

요즘 다들 전문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하다 보면 그게 업무 능력이 되고, ‘내가 이걸 잘하는구나'라는 사실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어렵겠지만, 아주 작은 시도를 해보면 좋겠어요.


회사 바깥에서도 일을 벌이고 계시죠? 재민 님이 만드시는 뉴스레터 ‘슬점'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회사 밖에서 친구와 함께 슬점이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한 지 1년 반 정도가 되었어요. 원고를 친구와 격주로 쓰면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하고, 삽화는 제가 매주 그리고 있어요. 

외부 협업이나 광고를 할 때만 수익이 나지만, 그런데도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데 쏟는 에너지가 취미를 뛰어넘거든요. 한 편의 뉴스레터를 완성하는 데에 약 8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매주 발행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빼놔야 해요.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할수록 책임감이 생겨서 일로 인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매주 마감을 놓치지 않고 발행하는 것에 더해서 어떻게 하면 구독자들이 뉴스레터를 더 잘 오픈할지, 구독자가 재미를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지 등 나름의 분석과 논의를 하게 돼요. 


수익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데도 계속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뉴스레터를 만드는 이유는 뭘까요? 이 일이 재민 님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나요?

창작하는 걸 좋아해요. 심지어 뉴스레터는 누가 이것을 보고 있는지가 드러나는데, 그게 매력이고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인스타그램 혹은 블로그에 올리면 익명의 누군가들이 보고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인 반면, 뉴스레터는 구독자라는 확실한 풀이 있잖아요. 이름을 가진 누군가들과 맞닿아있다는 감각이 좋아요. 

그리고 회사 밖에서 ‘슬점'을 만들 때의 제가 진짜 저 자신에 가까운 것 같아요. 회사에서는 일을 차질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더 날을 세우게 되거든요. ‘슬점'을 만들 때는 그냥 재미있어요. 소재가 잘 떠오르지 않아도 함께 만드는 친구랑 고민하는 과정이 재미있고요. 아무래도 실적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고, 그런 만큼 마음에 부담이 적어서 그런가봐요. 





정재민 님이 동료와 함께 만들고 있는 뉴스레터 '슬점'



그동안 조직에서 쌓아왔던 것과는 또 다른, ‘슬점’을 만드는 과정에서 쌓인 노하우나 전문성도 있을까요?

‘슬점'으로 외부 협업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파트너와 메일로 계속 소통하고 확인하면서 계약을 진행했는데, 그런 협업을 할 때는 어떤 점을 사전에 협의해야 하는지 알게 됐어요. 또 하나는, ‘슬점'을 만들면서 다른 뉴스레터들과 차별화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거든요. 그래서 대화 형식을 도입했고요. 그 점을 고민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기획안을 봤을 때도 하나의 ‘킥'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회사 안에서도 기획을 하시고, 밖에서도 기획을 하는 셈이잖아요. 그 두 개의 기획이 어떻게 다른가요?

회사 바깥에서의 기획은 제삼자를 설득하지 않아도 돼요. 저와 만드는 친구, 그러니까 우리끼리 동의하면 만들 수 있어요. 더불어 저는 개인적인 글을 쓸 때도 시리즈물로 기획하는 편이에요. 그게 재미있어요. ‘슬점'이나 제가 개인적으로 쓴 글을 보고 연재 제안이 오는 걸 경험하면서, 마음에 부담은 느껴지지만 ‘내가 나쁘지 않게 하고 있나 보다' 싶기도 해요. 앞으로 커리어를 선택할 때 글 기반의 콘텐츠와 기획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좋아하고, 몰입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런 생각이 또 새로운 일로 이어지면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는 뉴그라운드에서 다른 분들과 뉴스레터 기획안 써보는 모임을 리드하기도 했네요. 지난해 ‘슬점'을 시작하면서부터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일단 하자'라는 마인드가 생겼어요. 어차피 처음 하는 거, 그냥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벌벌 떨면서 새로운 일을 하지만, 하다 보면 괜찮게 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는 거죠. 새로운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요.



진행 및 정리. 황효진 (뉴그라운드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