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는 뉴그라운드 프로그램 <내-일을 위한 스스로 인터뷰>를 통하여 박지현 님께서 완성한 결과물입니다.
안녕하세요, 일하는 지현 님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하며 살아오셨네요. 8이라는 숫자만 보면 크지 않죠. 하지만 살아온 인생의 1/4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면 작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연극·뮤지컬 제작기획사에서 홍보 업무를 하였고, 2019년부터 현재까지 비영리 문화재단에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첫 일터에서는 공연 콘텐츠와 대중 사이에, 현재는 재단과 사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프로젝트 홍보 방향성 사이에 존재했습니다. 주요한 매개가 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문화예술업계에서 의사소통 활동에 기반을 두고 연결고리와 윤활유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일관된 맥락이 있겠네요.
대학교에서는 아동복지학과 상담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공연예술은 전공과는 아주 다른 방향성이라고 느껴지는데요.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전공도, 공연예술업계도 '사람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점에 끌렸고 그래서 선택했던 것 같아요. 청소년기부터 저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는 화두를 지니고 있었어요. 상담심리를 공부하며 그 화두에 불이 붙었죠. 당시 지니고 있던 심리적인 문제와 분투하는 과정에서 극장을 방공호로 삼아 자주 드나들었어요. 한 편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한날한시 한자리에 모여, 암전 속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니 배우와 스태프가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하며 하나의 호흡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자연스럽게 현장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죠. 언저리라도 좋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인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면서 보내야 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거든요.
공연예술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해요. 아날로그적인 협업이라는 점이요. 공연예술을 만들고 관람하는 일 모두 '빠르고 편하고 손쉽게'를 추구하는 보편적인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비효율적인 일이에요. 공연을 만드는 이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같은 결과물을 상상하며 함께 작업해야 하고, 관객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극장을 찾아야 하죠. 하지만 공연장에서는 이 세상에 오로지 딱 한 번 존재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모여 만든 작품으로 감동을 전하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 지니고 있는 프리즘으로 감동을 느끼며 공감하는 순간이요. 내일 같은 작품이 공연된다고 하더라도 오늘과 똑같을 수는 없어요. 공연은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지니까요.
여러 파트 중에서도 홍보 업무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뮤지컬 서포터즈로 대외활동을 하면서 홍보 업무를 접하게 되었고, 공연이라는 콘텐츠를 관객과 연결하는 일에 흥미가 생겼어요. 공연 관람이 일상으로 체화된 관객이 정말 드물어요. 내가 하는 일로 공연을 처음 접하게 되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나면 좋겠다는 막연한 꿈을 품게 되었죠. 대외활동을 하던 연극·뮤지컬 제작사에서 홍보팀 직원을 구하고 있는데 입사지원서를 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홍보하는 일은 어떤 건가요? 공연 홍보 업무의 핵심은 작품과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발굴하고 정리하고 전달하여 공연과 관람객을 연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채널에 맞는 글, 사진, 영상 기반의 콘텐츠 소스를 제공하거나, 콘텐츠를 기획하고 여러 협업자와 함께 제작하여 노출하는 일련의 일을 맡아서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작품이 정해지면 우선 홍보 방향성을 설정합니다. 그에 맞게 공연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컨셉 사진, 광고 영상 촬영을 진행하는 일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작품이 지닌 기본 정보에 홍보 포인트, 배우와 주요 스태프의 인터뷰를 녹인 종합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며 본격적으로 공연과 관객 사이에 접점을 만들어나가요. 매체에서 들어오는 취재 요청을 조율하고, 역으로 기획 기사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과 매체 인터뷰를 진행하여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죠. 지면 매체 외에도 배우가 출연할 수 있거나, 작품을 알리기에 적합한 방송이나 라디오를 섭외하기도 하고요. 소셜미디어, 블로그, 유튜브 등 각 채널에 맞는 사진, 카드뉴스, 영상, 웹진 등의 콘텐츠를 제작하여 노출하는 일뿐만 아니라 제작발표회, 쇼케이스, 프레스콜 등 오프라인 행사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진행하는 일도 합니다.
회사마다 홍보 업무의 범위가 다를 텐데요. 플레이그라운드로서 회사가 지닌 장점은 무엇이었나요? 햇수로 5년간 재직하며 총 26편의 공연 (연극 11편, 뮤지컬 15편) 곁에서 작품이 만들어지고 막이 내릴 때까지의 과정을 함께 했어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부터 연극까지, 일 년에 크고 작은 6~7개의 작품을 외주 없이 인 하우스로 업무를 소화하는 데다가, 티켓파워가 있는 한두 명의 배우에 기대어 가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구심점으로 삼아 배우와 스태프가 한마음 한뜻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많은 회사였어요. 공연 시에 발생하는 사건 사고에 빠르게 대응하고 책임지기 위해 매일 저녁, 모든 직원이 돌아가면서 매표소에서 극장 당직을 설 정도로 공연과 밀착하여 일하는 분위기였죠. 홍보 담당자로서 정글과도 같은 현장에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많은 양의 업무를 다방면으로 경험해볼 수 있었어요.
분초를 다투어가며 전투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그려졌어요. 일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게 단련된 역량이 있다면요? 의사소통 능력이요. 홍보 업무는 타인의 협조 없이는 대부분의 일이 불가능해요.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갑, 을, 병, 정 중에서 '정'이라고 할 정도로요. 배우, 매니저, 사진작가, 영상감독, 극장 담당자, 무대팀, 연출팀, 해외팀, 마케팅팀, 티켓팀, 기자, 방송작가, 관객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조율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거쳐야 일이 진행될 수 있거든요.
그중에서도 지현 님이 일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의사소통 방법이 있을까요? 9번 친절하고, 1번 단호하게 소통하는 법이요. 협업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력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기만 하면 휘둘리게 되고, 단호하게만 일 처리를 한다면 관계가 악화되죠. 아직도 적절한 선을 찾아가고 있어요. 의사소통 능력을 단련하는 일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앞으로도 나의 중심을 가지되, 사람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소통하며 관계 지향적으로 일을 해나가고 싶어요.
불특정 다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일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상황을 마주하셨을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면요? 장기 공연을 완수해낸 수고를 달랠 여유 없이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퇴사 통보를 한 이후 협상 테이블에 자주 앉아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오랜만에 연차를 냈어요. 집 근처 카페에 가서 퇴사하면 무얼 해보고 싶은지 노트를 펴서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문자 알람이 하나 왔어요. 휴일 여부에 상관없이 자주 울리던 알람이라 한숨을 쉬면서 확인했죠. “선생님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해주신 덕분에 아이들이 끝까지 즐겁게 홍보 활동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아역 배우 어머님께서 보낸 메시지였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소한 순간이네요. 특별히 그 기억을 꼽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 맡았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꾸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오디션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3년간의 대장정을 이어가는 작품이었고, 아역 배우들은 무대에 오르기까지 1년 가까이 훈련을 받는 과정을 거쳤어요. 홍보에서도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했죠. 아역 배우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웹진 에디터를 모집하여 콘텐츠로 기록하는 일을 맡아 긴 호흡으로 진행했어요.
어떤 일을 맡으면 태도에 관련된 나와의 약속으로 중심을 잡아가는 편이에요. 길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돌아와 붙잡을 곳을 만들기 위해서요. 아역 배우와 자주 만나 스킨십을 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다른 작품에 임할 때와는 또 다른 다짐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웹진을 운영할 때는 세 문장을 떠올리며 일을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첫째, 아역 배우들을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존중하자. 둘째, 아역 배우들이 홍보 일정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도록 하자. 셋째, 웹진 에디터에게 소정의 활동비밖에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들이 공연 제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챙기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과 즐거운 과정을 만들어간다면 웹진으로 발행되는 결과물도 잘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공연을 사랑해주신 관객분들이 콘텐츠를 꾸준히 구독하고 피드백을 보내주셔서 저와 웹진 에디터들 모두 힘을 내어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어요.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짤막한 메시지에 제가 전하고자 했던 진심이 미약하게라도 닿았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도 일을 하면서 잡아 온 중심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퇴사를 앞둔 시기여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죠. 어떤 일을 하든 나는 앞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겠구나 싶더라고요. 이왕이면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이런 순간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했습니다. (웃음)
"어떤 일을 하든 나는 앞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겠구나 싶더라고요."
사람과 공연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이 느껴져요. 그만큼 지현 님이 좋아하고, 잘 해내고 싶은 일이었을 텐데요. 그럼에도 그만두고 나와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밤낮, 주말 평일 구분 없이 애정과 열정을 쏟아 새하얗게 불태우며 일을 했어요. 좋아하고, 해보고 싶은 일이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일을 향한 제 마음이 응답받지 못할 짝사랑 같았어요. 엄청난 보상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 소진이 반복되니 공허감과 회의감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어느 날, 객석에 앉아 마지막 공연을 보고 있는데 원동력이 바닥난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지금 그만둬도 괜찮겠어? 미련이 남지는 않겠어?" 스스로 물었는데 제가 고민하지 않고 "응."이라고 답하더라고요. 그때 짝사랑을 끝내야겠다 결심했어요.
다음 회사에 들어가서야 번아웃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고요.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일주일 내내 밤잠을 설쳤어요. 분명히 그간 해온 일임에도 아무 글자도 읽히지 않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더라고요. ‘죽을 것 같다. 살려면 나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달 만에 퇴사했어요. 답답하리만치 모범생처럼 살아온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장 금방 포기한 일이에요. 당시 일을 함께해보자고 제안 주신 분께는 아직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어요. 제안을 수락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뛰쳐나왔으니까요.
첫 회사에서 나올 당시에는 몰랐어요. 몸과 마음이 죽을 것 같아 백기를 들었고, 본능적으로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걸요. 잠시 쉬었다가 다른 환경에 놓이니 그제야 깨달은 거죠. 한동안 번아웃 증상으로 인한 무기력과 우울을 경험했어요. 몸과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서 모든 것이 줄줄 새어나가는 느낌이었죠. 회복하는 시간을 보내며 일과 근시안적인 관계를 맺어왔음을 뼈저리게 확인했어요. 좋아한다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나라는 존재를 일에 잡아 먹혔던 거예요. 만족할만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도 받지 못한 채요.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그렇지만 동시에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을 거라 감히 짐작해봐요. 일이 나라는 존재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나의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일을 오래 이어갈 수 없음을 크게 깨달았어요. 앞으로 저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지속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주체적으로 핸들을 쥐고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삶 안에 일을 포함하면서요. 일에 관하여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앞으로 저에게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거예요.
"앞으로 저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지속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주체적으로 핸들을 쥐고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삶 안에 일을 포함하면서요."
건강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내리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선택이라는 행위에는 어쩔 수 없이 후회가 남기 마련이잖아요. 미련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과감한 선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용감하게 퇴사를 했다기엔 번아웃으로 튕겨져 나온 걸요. 퇴사 후에 무소속이 주는 불안과 막막함에 휘청거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후회나 미련은 남아있지 않더라고요. 주어진 업무와 상황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봐서 그런가 봐요. 이미 벌어졌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 후회하기를 포기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결론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으로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의 세계가 한 뼘 더 넓어졌어요. 요가나 명상에 집중하며 마음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물론이거니와, 배움을 통해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내밀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죠. 버틸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 버티고 있었더라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존중하고자 노력하는 환경에서, 결과 합이 맞는 동료와 일할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할 수 없었을 거예요.
현재 일하고 있는 곳에서 행운을 경험하셨나 봐요. 지금 일터의 어떤 부분이 원동력을 자극했나요? 퇴사하고 다음 단계를 고민할 때, 저에게는 지금 일터가 문화예술업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택지였어요. 좋은 콘텐츠가 제작되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과 그 과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곳이었거든요. 일하면서 줄곧 지니고 있던 사람, 과정, 협업에 대한 갈증을 이곳에서 해소해볼 수 있을지 경험하고 싶었어요. 운이 좋게도 공간과 사업의 규모가 확장되고, 새로운 브랜드를 정립하는 시기에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담당으로 합류하게 되었죠.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다가와요. 업무명을 듣는 많은 분이 얼굴에 큰 물음표를 띄우세요. (웃음)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여섯 명의 기획자 한 명 한 명이 브랜드가 되어 문화예술 인력육성, 기획 공연·전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비영리 문화재단이에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파트는 브랜드와 내부 구성원, 브랜드와 외부의 접점에서 재단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어요. 홍보물에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가이드에 맞게 적용이 되었는지 관리하고, 브랜드 스토리를 점검하며, 재단 소개 전단이나 브랜드 캠페인 등을 통해 재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알리는 일도 합니다.
지현 님은 어떤 일을 맡아서 하셨나요? 이전 일 경험을 바탕으로 홍보 플랫폼을 관리하고, 프로젝트 홍보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전담했습니다. 여섯 개 브랜드의 특성에 맞게 프로젝트별로 최적화된 홍보 방향을 제안하고, 소셜 미디어 등 재단을 대표하는 홍보 플랫폼에 노출되는 콘텐츠의 디자인과 내용에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공고히 하는 업무를 했어요. 프로젝트 별로 충돌하지 않도록 편성하고 조율하며 효율적으로 광고를 집행하는 일을 할 때는 관리자로, 재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할 때는 콘텐츠 생산자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브랜드를 정립하는 시기였기에 각각의 브랜드에 맞는 업무 프로세스를 만들고 다듬어가며 운영이 안정화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일했어요.
이전에 하셨던 PR 업무와 비슷한 듯 달라 보여요. 프로젝트 하나를 홍보적 관점으로 깊이 파고들기보다 프로젝트별로 맥락을 파악하되 브랜드 스토리에 걸맞게 가고 있는지, 일관성을 가지고 넓게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많았어요. 나무보다 숲을 볼 줄 아는 시야가 필요했죠. 예전에는 큰 배에 탑승한 선원 중 한 명이었다면, 지금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해요. 등대가 해 질 녘부터 새벽녘까지 불을 밝혀 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묵묵히 안내하는 것처럼 재단을 이루는 하위 브랜드가 정체성이나 방향성을 잃지 않게 지표가 되는 일이죠.
업무 환경이 변화되면서 지현 님의 시야도 확장되고, 새롭게 배우는 것들도 있었겠어요. 구성원 모두 각자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자율적으로 움직이지만 결국 재단이 목적하는 가치로 모이게 되는 자유로운 문화를 지닌 조직을 꿈꿨어요. 재단이 내세우는 가치가 단순히 보여주기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조직 구성원 한 명 한 명에게 깊게 내려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되기를 바랐죠. 프로젝트 홍보가 시작되는 시점 전후로 개별 미팅을 진행하여 공식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등 브랜드별 맞춤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브랜드가 힘을 잃지 않고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를 향하는 소통으로 내실을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파트명에 걸맞게 소통과 관련하여 많은 고민을 해오신 것 같아요. 앞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을 위해 일을 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일터에서도 그런 경험을 하셨나요? 23명의 전체 조직 구성원을 만나 인터뷰했던 사흘이 진하게 남아있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난 일 년간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회고하는 시간을 마련한 건데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서 연결고리로, 때론 인터뷰어로 수많은 인터뷰장에 존재했지만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어본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다 함께 재단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는 동료를 이해하는 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들이 저희에게 나누어준 내밀한 이야기를 2018년 연례 보고서에도 기록할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큼 곁에 있는 동료가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하죠. 지금 일터에서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를 만나셨다고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동료와 일하면서 진정한 팀워크를 경험했어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와 함께라면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는 멀고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더라고요. 저희 파트는 명확하게 업무를 분담하되, 대화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친밀감과 신뢰감을 쌓아 나갔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마음을 열고 나누는 진심 어린 소통은 건강한 관계로 이어지고,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껴지니 결점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고, 투명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개인도 팀도 자연스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더라고요. 선순환을 통해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모든 일의 기본이 된다는 진리를 되새길 수 있었어요. 지난 3년간 저라는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한 부분이 있다면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 속 문장처럼, 동료들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했던 시간 덕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특히 프로젝트 리더 님께 정말 감사해요.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맡은 포지션을 충분히 할 수 있게끔 장기적인 방향성을 설계해주시고, 저희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해 주시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담은 질문을 많이 건네어 주셨기에 어디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라포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일해온 시간보다 더 오래 일을 하실 텐데요. 지현 님은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떤 태도로 해나가고 싶으신가요.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얼마 전 예기치 못하게 다음 스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어요. 겸사겸사 일에 대한 마음과 나의 강점을 탐색하며 재정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매개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무언가를 연결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매개가 꼭 문화예술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사람에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 가까이에서 일했던 선배들이 "너랑은 꼭 다시 일해보고 싶다.”는 피드백을 주었는데요.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라는 칭찬을 꾸준히 듣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읽고 박지현이라는 사람이 더 궁금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이 글이 미래의 동료분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연결될 가능성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사람에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
*인터뷰는 뉴그라운드 프로그램 <내-일을 위한 스스로 인터뷰>를 통하여 박지현 님께서 완성한 결과물입니다.
안녕하세요, 일하는 지현 님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하며 살아오셨네요. 8이라는 숫자만 보면 크지 않죠. 하지만 살아온 인생의 1/4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면 작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연극·뮤지컬 제작기획사에서 홍보 업무를 하였고, 2019년부터 현재까지 비영리 문화재단에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첫 일터에서는 공연 콘텐츠와 대중 사이에, 현재는 재단과 사업이 추구하는 가치와 프로젝트 홍보 방향성 사이에 존재했습니다. 주요한 매개가 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문화예술업계에서 의사소통 활동에 기반을 두고 연결고리와 윤활유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일관된 맥락이 있겠네요.
대학교에서는 아동복지학과 상담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공연예술은 전공과는 아주 다른 방향성이라고 느껴지는데요.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전공도, 공연예술업계도 '사람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점에 끌렸고 그래서 선택했던 것 같아요. 청소년기부터 저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다는 화두를 지니고 있었어요. 상담심리를 공부하며 그 화두에 불이 붙었죠. 당시 지니고 있던 심리적인 문제와 분투하는 과정에서 극장을 방공호로 삼아 자주 드나들었어요. 한 편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한날한시 한자리에 모여, 암전 속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니 배우와 스태프가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하며 하나의 호흡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자연스럽게 현장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죠. 언저리라도 좋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인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면서 보내야 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거든요.
공연예술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해요. 아날로그적인 협업이라는 점이요. 공연예술을 만들고 관람하는 일 모두 '빠르고 편하고 손쉽게'를 추구하는 보편적인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비효율적인 일이에요. 공연을 만드는 이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같은 결과물을 상상하며 함께 작업해야 하고, 관객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극장을 찾아야 하죠. 하지만 공연장에서는 이 세상에 오로지 딱 한 번 존재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모여 만든 작품으로 감동을 전하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 지니고 있는 프리즘으로 감동을 느끼며 공감하는 순간이요. 내일 같은 작품이 공연된다고 하더라도 오늘과 똑같을 수는 없어요. 공연은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지니까요.
여러 파트 중에서도 홍보 업무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뮤지컬 서포터즈로 대외활동을 하면서 홍보 업무를 접하게 되었고, 공연이라는 콘텐츠를 관객과 연결하는 일에 흥미가 생겼어요. 공연 관람이 일상으로 체화된 관객이 정말 드물어요. 내가 하는 일로 공연을 처음 접하게 되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나면 좋겠다는 막연한 꿈을 품게 되었죠. 대외활동을 하던 연극·뮤지컬 제작사에서 홍보팀 직원을 구하고 있는데 입사지원서를 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홍보하는 일은 어떤 건가요? 공연 홍보 업무의 핵심은 작품과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발굴하고 정리하고 전달하여 공연과 관람객을 연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채널에 맞는 글, 사진, 영상 기반의 콘텐츠 소스를 제공하거나, 콘텐츠를 기획하고 여러 협업자와 함께 제작하여 노출하는 일련의 일을 맡아서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작품이 정해지면 우선 홍보 방향성을 설정합니다. 그에 맞게 공연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컨셉 사진, 광고 영상 촬영을 진행하는 일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작품이 지닌 기본 정보에 홍보 포인트, 배우와 주요 스태프의 인터뷰를 녹인 종합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하며 본격적으로 공연과 관객 사이에 접점을 만들어나가요. 매체에서 들어오는 취재 요청을 조율하고, 역으로 기획 기사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과 매체 인터뷰를 진행하여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죠. 지면 매체 외에도 배우가 출연할 수 있거나, 작품을 알리기에 적합한 방송이나 라디오를 섭외하기도 하고요. 소셜미디어, 블로그, 유튜브 등 각 채널에 맞는 사진, 카드뉴스, 영상, 웹진 등의 콘텐츠를 제작하여 노출하는 일뿐만 아니라 제작발표회, 쇼케이스, 프레스콜 등 오프라인 행사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진행하는 일도 합니다.
회사마다 홍보 업무의 범위가 다를 텐데요. 플레이그라운드로서 회사가 지닌 장점은 무엇이었나요? 햇수로 5년간 재직하며 총 26편의 공연 (연극 11편, 뮤지컬 15편) 곁에서 작품이 만들어지고 막이 내릴 때까지의 과정을 함께 했어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부터 연극까지, 일 년에 크고 작은 6~7개의 작품을 외주 없이 인 하우스로 업무를 소화하는 데다가, 티켓파워가 있는 한두 명의 배우에 기대어 가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구심점으로 삼아 배우와 스태프가 한마음 한뜻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많은 회사였어요. 공연 시에 발생하는 사건 사고에 빠르게 대응하고 책임지기 위해 매일 저녁, 모든 직원이 돌아가면서 매표소에서 극장 당직을 설 정도로 공연과 밀착하여 일하는 분위기였죠. 홍보 담당자로서 정글과도 같은 현장에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많은 양의 업무를 다방면으로 경험해볼 수 있었어요.
분초를 다투어가며 전투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그려졌어요. 일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게 단련된 역량이 있다면요? 의사소통 능력이요. 홍보 업무는 타인의 협조 없이는 대부분의 일이 불가능해요.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갑, 을, 병, 정 중에서 '정'이라고 할 정도로요. 배우, 매니저, 사진작가, 영상감독, 극장 담당자, 무대팀, 연출팀, 해외팀, 마케팅팀, 티켓팀, 기자, 방송작가, 관객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조율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거쳐야 일이 진행될 수 있거든요.
그중에서도 지현 님이 일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의사소통 방법이 있을까요? 9번 친절하고, 1번 단호하게 소통하는 법이요. 협업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력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필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기만 하면 휘둘리게 되고, 단호하게만 일 처리를 한다면 관계가 악화되죠. 아직도 적절한 선을 찾아가고 있어요. 의사소통 능력을 단련하는 일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앞으로도 나의 중심을 가지되, 사람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소통하며 관계 지향적으로 일을 해나가고 싶어요.
불특정 다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일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상황을 마주하셨을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면요? 장기 공연을 완수해낸 수고를 달랠 여유 없이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쁘고, 퇴사 통보를 한 이후 협상 테이블에 자주 앉아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오랜만에 연차를 냈어요. 집 근처 카페에 가서 퇴사하면 무얼 해보고 싶은지 노트를 펴서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문자 알람이 하나 왔어요. 휴일 여부에 상관없이 자주 울리던 알람이라 한숨을 쉬면서 확인했죠. “선생님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해주신 덕분에 아이들이 끝까지 즐겁게 홍보 활동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아역 배우 어머님께서 보낸 메시지였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소한 순간이네요. 특별히 그 기억을 꼽으신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 맡았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꾸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오디션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3년간의 대장정을 이어가는 작품이었고, 아역 배우들은 무대에 오르기까지 1년 가까이 훈련을 받는 과정을 거쳤어요. 홍보에서도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했죠. 아역 배우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웹진 에디터를 모집하여 콘텐츠로 기록하는 일을 맡아 긴 호흡으로 진행했어요.
어떤 일을 맡으면 태도에 관련된 나와의 약속으로 중심을 잡아가는 편이에요. 길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돌아와 붙잡을 곳을 만들기 위해서요. 아역 배우와 자주 만나 스킨십을 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다른 작품에 임할 때와는 또 다른 다짐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웹진을 운영할 때는 세 문장을 떠올리며 일을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첫째, 아역 배우들을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존중하자. 둘째, 아역 배우들이 홍보 일정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도록 하자. 셋째, 웹진 에디터에게 소정의 활동비밖에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들이 공연 제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챙기자.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과 즐거운 과정을 만들어간다면 웹진으로 발행되는 결과물도 잘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공연을 사랑해주신 관객분들이 콘텐츠를 꾸준히 구독하고 피드백을 보내주셔서 저와 웹진 에디터들 모두 힘을 내어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어요.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짤막한 메시지에 제가 전하고자 했던 진심이 미약하게라도 닿았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도 일을 하면서 잡아 온 중심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퇴사를 앞둔 시기여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했죠. 어떤 일을 하든 나는 앞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겠구나 싶더라고요. 이왕이면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 이런 순간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했습니다. (웃음)
"어떤 일을 하든 나는 앞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겠구나 싶더라고요."
사람과 공연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이 느껴져요. 그만큼 지현 님이 좋아하고, 잘 해내고 싶은 일이었을 텐데요. 그럼에도 그만두고 나와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밤낮, 주말 평일 구분 없이 애정과 열정을 쏟아 새하얗게 불태우며 일을 했어요. 좋아하고, 해보고 싶은 일이었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일을 향한 제 마음이 응답받지 못할 짝사랑 같았어요. 엄청난 보상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 소진이 반복되니 공허감과 회의감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어느 날, 객석에 앉아 마지막 공연을 보고 있는데 원동력이 바닥난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지금 그만둬도 괜찮겠어? 미련이 남지는 않겠어?" 스스로 물었는데 제가 고민하지 않고 "응."이라고 답하더라고요. 그때 짝사랑을 끝내야겠다 결심했어요.
다음 회사에 들어가서야 번아웃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고요.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일주일 내내 밤잠을 설쳤어요. 분명히 그간 해온 일임에도 아무 글자도 읽히지 않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더라고요. ‘죽을 것 같다. 살려면 나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달 만에 퇴사했어요. 답답하리만치 모범생처럼 살아온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장 금방 포기한 일이에요. 당시 일을 함께해보자고 제안 주신 분께는 아직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어요. 제안을 수락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뛰쳐나왔으니까요.
첫 회사에서 나올 당시에는 몰랐어요. 몸과 마음이 죽을 것 같아 백기를 들었고, 본능적으로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걸요. 잠시 쉬었다가 다른 환경에 놓이니 그제야 깨달은 거죠. 한동안 번아웃 증상으로 인한 무기력과 우울을 경험했어요. 몸과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서 모든 것이 줄줄 새어나가는 느낌이었죠. 회복하는 시간을 보내며 일과 근시안적인 관계를 맺어왔음을 뼈저리게 확인했어요. 좋아한다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나라는 존재를 일에 잡아 먹혔던 거예요. 만족할만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도 받지 못한 채요.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그렇지만 동시에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었을 거라 감히 짐작해봐요. 일이 나라는 존재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나의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일을 오래 이어갈 수 없음을 크게 깨달았어요. 앞으로 저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지속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주체적으로 핸들을 쥐고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삶 안에 일을 포함하면서요. 일에 관하여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앞으로 저에게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거예요.
"앞으로 저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지속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주체적으로 핸들을 쥐고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삶 안에 일을 포함하면서요."
건강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내리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선택이라는 행위에는 어쩔 수 없이 후회가 남기 마련이잖아요. 미련이 생기지는 않았나요? 과감한 선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용감하게 퇴사를 했다기엔 번아웃으로 튕겨져 나온 걸요. 퇴사 후에 무소속이 주는 불안과 막막함에 휘청거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후회나 미련은 남아있지 않더라고요. 주어진 업무와 상황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봐서 그런가 봐요. 이미 벌어졌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 후회하기를 포기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결론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으로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의 세계가 한 뼘 더 넓어졌어요. 요가나 명상에 집중하며 마음을 수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물론이거니와, 배움을 통해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내밀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죠. 버틸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 버티고 있었더라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존중하고자 노력하는 환경에서, 결과 합이 맞는 동료와 일할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할 수 없었을 거예요.
현재 일하고 있는 곳에서 행운을 경험하셨나 봐요. 지금 일터의 어떤 부분이 원동력을 자극했나요? 퇴사하고 다음 단계를 고민할 때, 저에게는 지금 일터가 문화예술업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택지였어요. 좋은 콘텐츠가 제작되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과 그 과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곳이었거든요. 일하면서 줄곧 지니고 있던 사람, 과정, 협업에 대한 갈증을 이곳에서 해소해볼 수 있을지 경험하고 싶었어요. 운이 좋게도 공간과 사업의 규모가 확장되고, 새로운 브랜드를 정립하는 시기에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담당으로 합류하게 되었죠.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다가와요. 업무명을 듣는 많은 분이 얼굴에 큰 물음표를 띄우세요. (웃음)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여섯 명의 기획자 한 명 한 명이 브랜드가 되어 문화예술 인력육성, 기획 공연·전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비영리 문화재단이에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파트는 브랜드와 내부 구성원, 브랜드와 외부의 접점에서 재단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어요. 홍보물에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가이드에 맞게 적용이 되었는지 관리하고, 브랜드 스토리를 점검하며, 재단 소개 전단이나 브랜드 캠페인 등을 통해 재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알리는 일도 합니다.
지현 님은 어떤 일을 맡아서 하셨나요? 이전 일 경험을 바탕으로 홍보 플랫폼을 관리하고, 프로젝트 홍보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전담했습니다. 여섯 개 브랜드의 특성에 맞게 프로젝트별로 최적화된 홍보 방향을 제안하고, 소셜 미디어 등 재단을 대표하는 홍보 플랫폼에 노출되는 콘텐츠의 디자인과 내용에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공고히 하는 업무를 했어요. 프로젝트 별로 충돌하지 않도록 편성하고 조율하며 효율적으로 광고를 집행하는 일을 할 때는 관리자로, 재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할 때는 콘텐츠 생산자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브랜드를 정립하는 시기였기에 각각의 브랜드에 맞는 업무 프로세스를 만들고 다듬어가며 운영이 안정화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일했어요.
이전에 하셨던 PR 업무와 비슷한 듯 달라 보여요. 프로젝트 하나를 홍보적 관점으로 깊이 파고들기보다 프로젝트별로 맥락을 파악하되 브랜드 스토리에 걸맞게 가고 있는지, 일관성을 가지고 넓게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많았어요. 나무보다 숲을 볼 줄 아는 시야가 필요했죠. 예전에는 큰 배에 탑승한 선원 중 한 명이었다면, 지금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해요. 등대가 해 질 녘부터 새벽녘까지 불을 밝혀 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묵묵히 안내하는 것처럼 재단을 이루는 하위 브랜드가 정체성이나 방향성을 잃지 않게 지표가 되는 일이죠.
업무 환경이 변화되면서 지현 님의 시야도 확장되고, 새롭게 배우는 것들도 있었겠어요. 구성원 모두 각자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자율적으로 움직이지만 결국 재단이 목적하는 가치로 모이게 되는 자유로운 문화를 지닌 조직을 꿈꿨어요. 재단이 내세우는 가치가 단순히 보여주기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조직 구성원 한 명 한 명에게 깊게 내려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되기를 바랐죠. 프로젝트 홍보가 시작되는 시점 전후로 개별 미팅을 진행하여 공식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등 브랜드별 맞춤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브랜드가 힘을 잃지 않고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를 향하는 소통으로 내실을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파트명에 걸맞게 소통과 관련하여 많은 고민을 해오신 것 같아요. 앞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찰나의 순간을 위해 일을 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일터에서도 그런 경험을 하셨나요? 23명의 전체 조직 구성원을 만나 인터뷰했던 사흘이 진하게 남아있어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난 일 년간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회고하는 시간을 마련한 건데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서 연결고리로, 때론 인터뷰어로 수많은 인터뷰장에 존재했지만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어본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다 함께 재단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는 동료를 이해하는 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들이 저희에게 나누어준 내밀한 이야기를 2018년 연례 보고서에도 기록할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큼 곁에 있는 동료가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하죠. 지금 일터에서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를 만나셨다고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동료와 일하면서 진정한 팀워크를 경험했어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와 함께라면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는 멀고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더라고요. 저희 파트는 명확하게 업무를 분담하되, 대화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친밀감과 신뢰감을 쌓아 나갔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마음을 열고 나누는 진심 어린 소통은 건강한 관계로 이어지고,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껴지니 결점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고, 투명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개인도 팀도 자연스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더라고요. 선순환을 통해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모든 일의 기본이 된다는 진리를 되새길 수 있었어요. 지난 3년간 저라는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한 부분이 있다면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 속 문장처럼, 동료들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했던 시간 덕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특히 프로젝트 리더 님께 정말 감사해요.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맡은 포지션을 충분히 할 수 있게끔 장기적인 방향성을 설계해주시고, 저희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해 주시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담은 질문을 많이 건네어 주셨기에 어디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라포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껏 일해온 시간보다 더 오래 일을 하실 텐데요. 지현 님은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떤 태도로 해나가고 싶으신가요.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얼마 전 예기치 못하게 다음 스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렸어요. 겸사겸사 일에 대한 마음과 나의 강점을 탐색하며 재정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매개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무언가를 연결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매개가 꼭 문화예술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사람에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 가까이에서 일했던 선배들이 "너랑은 꼭 다시 일해보고 싶다.”는 피드백을 주었는데요.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라는 칭찬을 꾸준히 듣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읽고 박지현이라는 사람이 더 궁금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이 글이 미래의 동료분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연결될 가능성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사람에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