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감각적, 좋은 취향, 안목 있는' 말고 나만의 재미를 찾아서

최근 저의 재미 중 하나는 새로운 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문단마다 알차게 들어있는 케이팝 레퍼런스, 케이팝이라는 산업에 대한 지긋지긋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까지. 용감하고 다정한 글이라고 생각했어요. 빨리 다음 레터를 읽고 싶어졌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발행인이자 뉴그라운드 워머스인 오채은 님입니다. 채은 님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하셨대요. 한 달 살기를 시작한 다음 날 밤, 제주도에서 줌에 접속한 채은 님과 만났습니다.

채은 님은 사는 건 재미도 없고, 그래서 웃을 일도 별로 없다고 하셨지만 채은 님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저는 정말 많이 웃었어요. 어떤 순간에는 약간 눈물이 맺히기도 했고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웃기고 울리고 감탄하게 만드는, 채은 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효진: 채은 님, 에디터로 일하다가 쉬기 시작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채은: 패션 매거진에서 어시스턴트로 1년 반 정도,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서 1년 반 정도 일하다가 2023년 6월부터 쉬었어요. 쉰 지 거의 반년 정도 된 거죠.


효진: 보통 어떻게 하루를 보내세요?

채은: 작년에 퇴사하고 난생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PT를 받는 날에는 오전에 운동을 다녀오고, 점심시간이 되면 음식을 요리해서 먹어요. 오후는 그냥 마음껏 시간 낭비를 하면서 보냅니다. 특히 평일 낮 시간을 제 마음대로 보내는데요, 집에서 멀리 있는 카페에 가본다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친구들을 만나요. 회사에 다닐 때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못 갔던 수업이나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요. 사실은 이런 것보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OTT를 보는 시간이 긴 것 같아요. 또 어떤 날은 청소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기도 하고요.


효진: ‘난생처음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예전에는 일 때문에 짬이 안 나서 운동을 못 하신 건가요?

채은: 그때는 일만으로도 너무 피곤했어요. 일 외에 의미 있고 생산성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게 엄청 부담스럽게 느껴졌어요.


효진: 맞아요, 일할 때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혹시 앞으로 다시 회사에 들어가실 계획이나 의향이 있으신가요? 저는 기자로 7년 정도 일하고 프리랜서가 됐었는데, 그때 ‘내가 다시 조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생활 패턴을 포기하고 고정적인 시간과 조직에 매여 있을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채은: 아마 돈이 떨어지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하겠죠? 그런데 모르겠어요. 저는 조직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제가 일했던 업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큰 것 같아요. 그리고 보통은 일을 쉬고 있다고 하면 다음 스텝을 위한 준비 기간처럼 생각하고는 하잖아요. 지금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니어서 ‘다음에 어떤 일을 할까’, ‘어떤 형태의 일을 어떤 조직에서 할까’에 대한 생각은 없고 최대한 일 안 하는 기간을 오래오래 늘리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여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냥 지금은 그런 생각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패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효진: 원래 불안감이나 조급증이 낮은 편이신가요?

채은: 원래는 높은 편인데요, 어차피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잖아요. 갑자기 로또에 당첨이 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다시 에디터 일을 꼭 해야 한다거나,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일을 꼭 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어요. ‘돈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든 하겠지’ 이런 마음이에요.


효진: 그건 원래 채은 님이 가지고 계셨던 생각과 태도일까요, 아니면 하고 싶었던 일을 한 번 해본 후에 얻은 깨달음일까요?

채은: 저는 원래 잡지 만드는 일을 엄청 하고 싶었거든요. 막상 그 일을 해보니 어떤 일이든 모든 게 만족스럽거나 모든 게 완벽한 건 없겠더라고요. 평소에 제가 고려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하더라도 또 다른 즐거움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겠죠. 어릴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패배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좋아하는 일을 해보니 그것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일일 뿐이지 세상에서 인정해 주는 직업인 것도 아니었고요. 일에 대한 생각이 그런 면에서 많이 바뀌었어요. 꼭 좋아하는 일이나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어도 된다, 생계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요.


효진: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인데 그만두고 싶으셨던 이유가 있나요?

채은: 에디터를 꿈꾸던 시절의 저와 지금의 제가 많이 달라졌어요. 모든 일에 기쁨과 슬픔이 있잖아요. 에디터를 하기 전에는 기쁨이 더 클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을 하면서는 슬픔에 더 크게 느껴졌어요. ‘내가 지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 ‘내 자리에 있는 느낌이 아니다’라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어요. 감각적, 안목 있는, 좋은 취향, 이런 단어들에 좀 피곤해졌던 것 같아요. ‘그런 단어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닌가?’라는 의문도 있었고요. 일단 제 삶에 그런 단어들이 별로 없거든요.

일본의 어느 브랜드 셔츠만을 입는, 혹은 독일의 어느 브랜드에서 안경테 하나까지 섬세하게 골라 수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잡지에 실리지만, 스파오에서 옷을 사 입는 사람이나 다비치 안경에서 안경을 고르는 사람은 잡지에서 찾아보기 어렵잖아요. 예전에는 저도 일본의 어느 브랜드 셔츠만을 입고 안경테 하나까지 섬세하게 고른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그런 삶을 존경하지 않고, 오히려 지양하고 싶다는 점에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효진: 그런 고민 끝에 일을 그만두게 되셨지만, 아쉬운 점도 있는지 궁금해요.

채은: 에디터의 장점은 인터뷰를 핑계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일할 때 필진을 리스트업하거나 디자이너 작업자분들을 찾아야 할 때 전부 여성분들로 꾸렸거든요. 예를 들면 회사에서 ‘외주 디자이너랑 작업해 보자’라고 하면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 같은 데서 몰래 지켜봤던 분들을 리스트업하고 그랬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실제로 인터뷰나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경우가 있었죠.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그런 순간이 없어졌다는 게 아쉬워요. ‘나 에디터 하면서 배두나 씨를 꼭 만나보고 싶어’, ‘켄지 님 인터뷰를 해보고 싶어’ 이런 게 있었는데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명함이 사라졌다는 거, 그게 아쉬운 점이에요.


"살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키워드를 꼽자면

하나는 재미, 하나는 다양성이에요."


효진: 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꾸준히 발행하시면 켄지 님은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채은: 못 만날 것 같아요. (웃음)


효진: "감각적, 안목 있는, 좋은 취향" 말고, 그럼 채은 님의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예요?

채은: 살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두 가지 키워드가 있어요. 하나는 재미, 하나는 다양성이에요. 요즘은 특히 재미가 중요한 것 같아요. 사는 게 너무 재미가 없고, 친구들이랑 세상살이 얘기를 하다 보면 너무 열 받는 일도 많잖아요. 웃을 일이 사실 잘 없어요. 막 깔깔깔 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소 지을 일조차 잘 없더라고요. 재미있어지고 싶어서 뉴스레터를 시작했어요.


효진: 그게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이죠. 어떻게 기획하신 건지 궁금해요.

채은: 회사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글쓰기 모임이나 워크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기획을 정리하는 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주변에서 응원을 해주셔도 저는 제 이야기를 쓰는 게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반면 케이팝에 대한 무언가를 만드는 건 엄청 고민이 되지도 않았고, 재미있기도 했어요. 거창한 계획 없이 아주 작게 그냥 시작한 거죠. 다만 케이팝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좀 민감한 소재잖아요. 안전장치를 두고 싶어서 뉴스레터를 만들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최대로 잡아도 내 친구들, 혹은 지인들 13명 정도 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오채은 님이 발행하는 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첫 호. 구독 신청은 이 링크에서.



"어느 시점부터 아이돌을

자연스럽게 직업인으로 보게 된 것 같아요."



효진: 이걸 채은 님께 꼭 여쭤보고 싶었어요. 페미니스트들은 내가 가진 신념과 실제 경험 혹은 취향의 간극 때문에 많은 순간 모순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저만 해도 케이팝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였다가 산업의 불평등을 깨닫고 관련 글을 전혀 쓰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제가 케이팝을 아예 안 듣거나 안 좋아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신곡도 열심히 찾아 듣고, 뮤직비디오도 열심히 봐요. ‘케이팝을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기도 한데, 채은 님은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계신지 듣고 싶었어요.

채은: 저는 정말 솔직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페미니스트로서 혼란스러워요. 케이팝을 제외하더라도 그냥 사는 것 자체가 매우 혼란스럽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케이팝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입장 정리를 당연히 못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뉴스레터에 이런저런 안전장치를 계속 두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떠나보낸 아이돌들이 있잖아요. 그 시점 이후로 아이돌을 공인이나 우상보다는 자연스럽게 직업인으로 보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출근할 때 화장도 안 하고 어떨 때는 머리도 안 감아도 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24시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고, 언제 어디서 모습이 찍힐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죠. 제가 열심히 일해도 성과가 별로 좋지 않을 때는 큰 성과를 얻은 아이돌들이 부럽기도 하고, 반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아이돌들에게는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기도 해요. 그냥 그들을 정말 직업인으로 보게 된 것 같아요. 다만 아직도 미성년자인 아이돌을 바라보는 건 좀 어려워요. 설명하기 쉽지 않을 만큼 복잡해서 모른 척할 때가 많아요.

삶에서 이런 입장 정리를 해야 하는 많은 분야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요. 그런 입장입니다.


효진: 요즘 제일 즐겨듣고 계신 케이팝은 뭔가요?

채은: 인터뷰 직전까지 들은 게 에스파의 ‘시대유감’이에요. 원곡이 서태지 씨의 ‘시대유감’인데, 1995년에 발매됐었더라고요. 가사를 보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살기 힘들었구나 싶어요. 가사가 이래요.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왜 기다려 왔잖아 /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1995년에도 젊은이들이 살기 진짜 힘들었나 보다, 사는 게 원래 힘든 거구나, 그런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또 말이 길어지는데 여기까지 할게요.


효진: 얘기해 주세요. 뭐예요?

채은: 에스파가 포켓몬스터 OST를 부른 적이 있어요. ‘We Go’라는 곡인데 밴드 음악이거든요. 제가 그걸 듣자마자 에스파는 밴드 음악을 내야 한다, 밴드 사운드에 노래를 내줘야 한다 그랬는데 ‘시대유감’이 원래 밴드 음악이에요. 그걸 이번에 에스파 버전으로 낸 거죠. 예상처럼 너무 찰떡이고 좋았다는 얘기입니다.


효진: 알겠습니다. 그 곡도 꼭 들어볼게요. 그렇다면 워머스와 함께 듣고 싶은 케이팝도 있나요? 한 곡만 추천해 주세요.

채은: 모든 질문 중에 이게 제일 고민됐어요. 저도 라디오에서 듣고 알게 된 곡인데, 딱 정석 케이팝은 아니에요. 3인조 펑크 록밴드 피싱걸스의 ‘파괴왕’이라는 노래입니다. ‘끝없는 업무 지옥 / 사수해 정시 퇴근 / 야근은 없다! 집에 가자! / 날 붙잡는 주둥이를 파괴해’라는 가사가 있어요. 세상을 살다보면 이것저것 파괴하고 싶을 때가 많잖아요. 워머스 선생님들도 이것저것 파괴하고 싶으실 때 이 곡을 들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골랐어요.


효진: 좋네요. 이 곡도 꼭 들어보는 걸로… 마지막 질문이에요. 보통 일을 쉬고 계신 분들은 뉴그라운드가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이기 때문에 멤버십 가입을 잘 안 하시거든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이 안에서 나눌 이야기나 함께 할 활동이 별로 없다고 여기시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요. 채은 님은 왜 뉴그라운드 멤버십에 다시 가입하셨나요?

채은: 저도 퇴사 후에는 일과 관련된 것, 생산성, 열심, 이런 것들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 상태에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초치는 얘기만 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멤버십에 가입하지 않고 쉬었어요. 이제 그런 시기는 좀 지났고, 일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뉴그라운드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시 가입하게 됐어요.

학교나 회사를 다니지 않고,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면 친구나 동료를 만날 곳이 없잖아요. 일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뉴그라운드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이야기들보다 가장 우선으로는, 뉴그라운드가 계속 있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다시 가입했어요. 그러니까 사실 저는, 뉴그라운드를 떠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