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쓰인 글들의 첫 번째 독자는 저였습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쉽게 전시에 말을 붙이고 입을 떼고 글로 모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박물관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제대로 보고 감상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 내부에서 일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박물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했습니다.”
_이연화,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중
이연화 님의 활동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습니다. ‘사람들이 박물관을 더 가깝게 느끼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연화 님의 고민은 전시를 함께 보고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해 보는 모임인 ‘전시 독후감’, 그리고 내 곁의 물건을 박물관의 소장품처럼 발굴, 연구, 등록해보는 ‘호장품’ 등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실행으로 이어졌어요. 미술이론과 박물관 교육학에 대한 공부, 박물관에서의 근무 경험, 박물관과 이용자들에 대한 애정이 더해져 연화 님은 박물관 안팎에서 박물관에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으로서 고유한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난 10월에는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뉴그라운드 커뮤니티의 멤버, ‘워머스’들이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나누는 자리인 [워머스 발표회]의 첫 번째 시간에는 연화 님을 모셨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뾰족하게 다듬어나가고, 그것이 세상과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멋진 결과물까지 완성해 냈다는 점에서 연화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기대한 대로, 실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과 고민을 연화 님은 나누어 주셨습니다.
[워머스 발표회] 시작 전, 제가 메일로 보낸 질문지에 연화 님이 돌려주신 답변을 편집하고 정리하여 커뮤니티 리포트에 싣습니다. 내가 선 자리와 나의 시선이 고유하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분들, 또는 그 사실을 믿고 싶은 분들께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이야기들입니다.

© 사과집
효진: 연화 님, [워머스 발표회]의 첫 호스트가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지난해 10월에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를 출간하셨는데요, 책 출간 전과 후의 일상이 유사한지, 혹은 달라졌다고 느끼시는지 궁금해요.
연화: 책을 냈다고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고요(웃음), 예상보다 빨리 2쇄를 찍은 게 기쁘긴 해요. 좋은 점이라면 제 일을 많은 분이 예전보다 좀 더 쉽게 인정해 주시는 것?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설명을 조금 덜 해도 된다는 게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건 꼭 책 때문만은 아니지만 예술인 혹은 미술인 커뮤니티와 접점이 생겼다는 게 제일 변화한 지점입니다. 2023년부터 전업으로 예술을 하시거나 정체성이 예술가인 사람들과 개인적인 만남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2024년 스터디 모임에 들어간 뒤로 만남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 기분이에요. 만나는 사람들이 또 한 번 바뀌었구나 싶어요.
"저는 제가 ‘자신이 제대로 걷는 걸 보기 위해서
반복하여 제자리를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효진: 저는 연화 님을 2019년 ‘빌라선샤인’이라는 밀레니얼 여성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어요. 현재는 이렇게 연화 님만의 박물관 감상법을 책으로 펼쳐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뭐지?’를 오래 고민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연화: 초반에는 박물관 교육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저의 현장에 대해 고민했어요. 나의 현장은 박물관이겠구나, 박물관에서 박물관의 허락을 구하여 참여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면 논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구직을 해야만 했어요. 나의 현장에 있으려면, 연구자로서 제대로 보려면 박물관의 안쪽을 살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지만 엉거주춤 질문의 자세를 취하려고 하면 현장은 금세 바뀌고, 저는 거기에 새로 적응하기 위해 바빴어요.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자리를 뺏긴다는 느낌이었달까요. 제 현장은 저를 피해서 자꾸만 도망갔습니다.
학교만 잘 다니면, 현장에서 잘 보기만 하면, 질문과 실마리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더라고요. 박물관에 묻는 대신 나는 무엇을 궁금해하는 사람인지 살피기로 했습니다. 침착하게 질문을 다듬기 시작했어요. 이런 질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박물관이 참여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소통하는 공간이라면, 과연 참여자들은 전시장에서 설명을 듣기만 해야 할까요?”
박물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묻고 듣기로 결정한 것이죠. 어떤 전시물이 인상 깊었거나 좋았는지, 참여자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요. 사실 현장은 박물관 어디에든 있었는데 제가 그걸 인식하지 못했던 거예요. 제가 있는 곳을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살피기 시작하자 물어볼 사람이 생겨났어요. 그때부터 저의 현장은 도망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자신이 제대로 걷는 걸 보기 위해서 반복하여 제자리를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효진: 말씀하신 것처럼 박물관 안에서도 일을 해오셨지만, 마침내는 박물관 바깥에서 박물관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결정하셨지요. 박물관 안이 아닌 바깥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물관 바깥에서만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연화: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일과 자리를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박물관 바깥에서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다짐이 되었고요.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덕분에 지금까지 제가 일하고 만들어온 과정이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전시를 직접 만드는 곳의 우선순위는 전시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우선순위는 사람에게 있고요. 전시를 보러 가고 싶은 사람, 혹은 보러 온 사람이지요. 저의 현장에서는 우선순위를 헷갈릴 필요가 없어요. 기관 바깥에서 제가 개인으로서 참여자들에게 전시에 대한 감상을 물어볼 때 사람들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낄 것 같기도 해요. 반대로,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열성적인 관람객이자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때 더욱 효과적인 발화가 될 거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관 같은 곳에서는 보통 내부자보다 외부자의 목소리에 좀 더 신경 쓰기도 하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제 옆의 동료 시민들과 함께 종종 기관 안으로도 들어가고 싶어요.
효진: 혼자 박물관에 관해 고민할 때와 다르게, ‘전시독후감’과 같은 모임을 하면서 연화 님이 새롭게 알게 된 점들은 무엇일까요?
연화: 각자 전시를 감상하는 경로와 감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점이요.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분들이 교차해서 다른 프로그램에도 오시고 반복적으로 저를 응원해 주시기도 해요. 일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동료가 되기도 하고요.

효진: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등록해 보는 ‘호장품’도 ‘전시독후감’도, 연화 님의 작업은 결국 가까이 있는 것을 새롭게, 나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고 이름 붙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작업이 일반 감상자들에게 의미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일까요?
연화: 공적 존재와 사적 존재가 교차하는 시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할 수 있어요. 특정한 문화가 다른 문화들보다 높고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죠. 교과서, 공연장,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가 좋은 문화라고 쉽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내 옆에 있는 문화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문화보다 낮은 것이라고 여기다 보면 수치심이 듭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좁은 문화를 향유하거나 거기에 내가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요.
저는 '취향'이라는 게 자꾸만 좁은 문화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좀 답답하거든요. 예를 들면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나오는 '제품'과 '상품'으로 제시되는 문화에 질릴 때가 있잖아요. 우리의 일상을 돌이켜봐야 해요. 삶을 다양하게 하는 취향을 개발하는 방법은 높고 좁은 문화로 향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문화 사이 사이에 있어요. 그러니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문화를 찾아내는 것이 결국에는 단단한 취향과 선택, 삶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효진: 연화 님이 하고 계신 작업은 레퍼런스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더욱 어렵기도 했을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나는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고민될 때 어디서 힌트나 힘을 얻으셨나요?
연화: 나는 나의 방식대로 일한다는 것, 나를 돕고 도와줄 주변을 잘 안다는 것에서 힘을 얻었어요. 한 번에 정답을 찾고 결론을 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먹을수록 힘겨워하는 데 긴 시간을 들이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경계가 어디인지, 왜 그렇게 할 수 있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제 주변에 있는 얼굴들과 자원을 떠올리는 데 더 큰 힘을 쏟게 됩니다. 밀려나지 않을 나의 자리는 일단 그곳을 지키면서 충분한 시간을 들이다 보면 단단하게 만들어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내가 있는 곳이 가장자리이고, 그곳이 소외되거나 힘이 없는 자리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내가 해볼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될 수도 있어요.
"박물관 안팎으로 이야기가 교차하는 경로를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효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화 님의 다음 스텝이 더욱 궁금해졌어요. 다음 스텝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요. 앞으로 연화 님이 더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연화: 전문성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 쓰기,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전국 13개 박물관 다녀오기를 하고 싶어요.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박물관에 가고 싶어요. 박물관에 다녀오는 것은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기간을 잡고 있는데요, 지역에서 저의 이야기와 관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관계 맺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박물관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이야기가 교차하는 경로를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최종 결과물은 무엇이 될지 저도 참 궁금합니다.
효진: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56쪽에서 “박물관이 중요한 것들을 모아둔 물리적인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만큼, 무엇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의견을 나누는 시민들의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쓰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전시나 박물관이 있다면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연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사유의 방'을 추천해 드립니다. 박물관 ,그리고 전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예요. 국립중앙박물관에 간 김에 기증관과 청자-분청사기/백자실까지 둘러보신다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갈 거에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13개 박물관에는 각각 일종의 브랜드관이 있거든요. 박물관마다 대표 유물이나 지역과 연계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테마를 명확히 보여주려고 해요. 예를 들면 공주박물관에는 백제 무령왕릉 관련 전시관, 대구박물관에는 의복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관이 있고, 직지와 공예비엔날레가 있는 청주에는 금속공예 전시가 특화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훌륭한 전시보다 훌륭한 관람자를 만나고 싶어요. 계신 곳이 어디든 박물관의 상설전시실을 뜯어보고 친구나 동료, 가족들과 전시가 어땠는지를 서로 묻고 답하는 작업을 해보시라고 하면.... 너무 숙제 같겠죠? (웃음)
© 사과집
효진: 연화 님, [워머스 발표회]의 첫 호스트가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 지난해 10월에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를 출간하셨는데요, 책 출간 전과 후의 일상이 유사한지, 혹은 달라졌다고 느끼시는지 궁금해요.
연화: 책을 냈다고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고요(웃음), 예상보다 빨리 2쇄를 찍은 게 기쁘긴 해요. 좋은 점이라면 제 일을 많은 분이 예전보다 좀 더 쉽게 인정해 주시는 것?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설명을 조금 덜 해도 된다는 게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건 꼭 책 때문만은 아니지만 예술인 혹은 미술인 커뮤니티와 접점이 생겼다는 게 제일 변화한 지점입니다. 2023년부터 전업으로 예술을 하시거나 정체성이 예술가인 사람들과 개인적인 만남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2024년 스터디 모임에 들어간 뒤로 만남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 기분이에요. 만나는 사람들이 또 한 번 바뀌었구나 싶어요.
"저는 제가 ‘자신이 제대로 걷는 걸 보기 위해서
반복하여 제자리를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효진: 저는 연화 님을 2019년 ‘빌라선샤인’이라는 밀레니얼 여성 커뮤니티에서 처음 만났어요. 현재는 이렇게 연화 님만의 박물관 감상법을 책으로 펼쳐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뭐지?’를 오래 고민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연화: 초반에는 박물관 교육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저의 현장에 대해 고민했어요. 나의 현장은 박물관이겠구나, 박물관에서 박물관의 허락을 구하여 참여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면 논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구직을 해야만 했어요. 나의 현장에 있으려면, 연구자로서 제대로 보려면 박물관의 안쪽을 살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지만 엉거주춤 질문의 자세를 취하려고 하면 현장은 금세 바뀌고, 저는 거기에 새로 적응하기 위해 바빴어요.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자리를 뺏긴다는 느낌이었달까요. 제 현장은 저를 피해서 자꾸만 도망갔습니다.
학교만 잘 다니면, 현장에서 잘 보기만 하면, 질문과 실마리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더라고요. 박물관에 묻는 대신 나는 무엇을 궁금해하는 사람인지 살피기로 했습니다. 침착하게 질문을 다듬기 시작했어요. 이런 질문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박물관이 참여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소통하는 공간이라면, 과연 참여자들은 전시장에서 설명을 듣기만 해야 할까요?”
박물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묻고 듣기로 결정한 것이죠. 어떤 전시물이 인상 깊었거나 좋았는지, 참여자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요. 사실 현장은 박물관 어디에든 있었는데 제가 그걸 인식하지 못했던 거예요. 제가 있는 곳을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살피기 시작하자 물어볼 사람이 생겨났어요. 그때부터 저의 현장은 도망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자신이 제대로 걷는 걸 보기 위해서 반복하여 제자리를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효진: 말씀하신 것처럼 박물관 안에서도 일을 해오셨지만, 마침내는 박물관 바깥에서 박물관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결정하셨지요. 박물관 안이 아닌 바깥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물관 바깥에서만 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연화: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일과 자리를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박물관 바깥에서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다짐이 되었고요.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덕분에 지금까지 제가 일하고 만들어온 과정이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전시를 직접 만드는 곳의 우선순위는 전시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우선순위는 사람에게 있고요. 전시를 보러 가고 싶은 사람, 혹은 보러 온 사람이지요. 저의 현장에서는 우선순위를 헷갈릴 필요가 없어요. 기관 바깥에서 제가 개인으로서 참여자들에게 전시에 대한 감상을 물어볼 때 사람들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낄 것 같기도 해요. 반대로,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열성적인 관람객이자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때 더욱 효과적인 발화가 될 거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관 같은 곳에서는 보통 내부자보다 외부자의 목소리에 좀 더 신경 쓰기도 하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제 옆의 동료 시민들과 함께 종종 기관 안으로도 들어가고 싶어요.
효진: 혼자 박물관에 관해 고민할 때와 다르게, ‘전시독후감’과 같은 모임을 하면서 연화 님이 새롭게 알게 된 점들은 무엇일까요?
연화: 각자 전시를 감상하는 경로와 감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점이요.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분들이 교차해서 다른 프로그램에도 오시고 반복적으로 저를 응원해 주시기도 해요. 일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동료가 되기도 하고요.
효진: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등록해 보는 ‘호장품’도 ‘전시독후감’도, 연화 님의 작업은 결국 가까이 있는 것을 새롭게, 나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고 이름 붙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작업이 일반 감상자들에게 의미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일까요?
연화: 공적 존재와 사적 존재가 교차하는 시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할 수 있어요. 특정한 문화가 다른 문화들보다 높고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죠. 교과서, 공연장,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가 좋은 문화라고 쉽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내 옆에 있는 문화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문화보다 낮은 것이라고 여기다 보면 수치심이 듭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좁은 문화를 향유하거나 거기에 내가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요.
저는 '취향'이라는 게 자꾸만 좁은 문화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좀 답답하거든요. 예를 들면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나오는 '제품'과 '상품'으로 제시되는 문화에 질릴 때가 있잖아요. 우리의 일상을 돌이켜봐야 해요. 삶을 다양하게 하는 취향을 개발하는 방법은 높고 좁은 문화로 향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문화 사이 사이에 있어요. 그러니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문화를 찾아내는 것이 결국에는 단단한 취향과 선택, 삶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효진: 연화 님이 하고 계신 작업은 레퍼런스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더욱 어렵기도 했을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 ‘나는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고민될 때 어디서 힌트나 힘을 얻으셨나요?
연화: 나는 나의 방식대로 일한다는 것, 나를 돕고 도와줄 주변을 잘 안다는 것에서 힘을 얻었어요. 한 번에 정답을 찾고 결론을 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먹을수록 힘겨워하는 데 긴 시간을 들이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경계가 어디인지, 왜 그렇게 할 수 있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제 주변에 있는 얼굴들과 자원을 떠올리는 데 더 큰 힘을 쏟게 됩니다. 밀려나지 않을 나의 자리는 일단 그곳을 지키면서 충분한 시간을 들이다 보면 단단하게 만들어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내가 있는 곳이 가장자리이고, 그곳이 소외되거나 힘이 없는 자리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내가 해볼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될 수도 있어요.
"박물관 안팎으로 이야기가 교차하는 경로를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효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화 님의 다음 스텝이 더욱 궁금해졌어요. 다음 스텝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요. 앞으로 연화 님이 더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연화: 전문성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 쓰기,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전국 13개 박물관 다녀오기를 하고 싶어요.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박물관에 가고 싶어요. 박물관에 다녀오는 것은 1년 반에서 2년 정도의 기간을 잡고 있는데요, 지역에서 저의 이야기와 관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관계 맺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 박물관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이야기가 교차하는 경로를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보고 싶어요. 최종 결과물은 무엇이 될지 저도 참 궁금합니다.
효진: <박물관은 조용하지 않다> 56쪽에서 “박물관이 중요한 것들을 모아둔 물리적인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만큼, 무엇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의견을 나누는 시민들의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쓰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전시나 박물관이 있다면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연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사유의 방'을 추천해 드립니다. 박물관 ,그리고 전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예요. 국립중앙박물관에 간 김에 기증관과 청자-분청사기/백자실까지 둘러보신다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갈 거에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13개 박물관에는 각각 일종의 브랜드관이 있거든요. 박물관마다 대표 유물이나 지역과 연계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테마를 명확히 보여주려고 해요. 예를 들면 공주박물관에는 백제 무령왕릉 관련 전시관, 대구박물관에는 의복을 중심으로 하는 전시관이 있고, 직지와 공예비엔날레가 있는 청주에는 금속공예 전시가 특화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훌륭한 전시보다 훌륭한 관람자를 만나고 싶어요. 계신 곳이 어디든 박물관의 상설전시실을 뜯어보고 친구나 동료, 가족들과 전시가 어땠는지를 서로 묻고 답하는 작업을 해보시라고 하면.... 너무 숙제 같겠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