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커뮤니티가 바꾼 일, 삶

한경희 님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멤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희 님이 처음 뉴그라운드의 워머스가 되었을 때 저는 약간 놀랐어요. FDSC라는 든든한 커뮤니티에서 활동 중이신데 뉴그라운드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되었고요. 온라인에서, 또 오프라인에서 경희 님과 몇 번을 마주치며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경희 님은 오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누군가와 함께 즐거움을 만드는 방법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았거든요.

9월의 커뮤니티 리포트를 준비하며 그런 자신과 꼭 닮아보이는 디자인 스튜디오,
'손에 손잡고'를 운영하고 계신 경희 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유명한 노잼 펄슨"이라는 경희 님 스스로의 표현과는 다르게, 경희 님과 인터뷰하는 동안 저는 아주 많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FDSC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설명하시는 부분에서는 마음이 조금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효진: 경희 님, 요즘 주로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무엇에 시간을 많이 쓰고 계신가요?

경희: 지난주에는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드디어 봤어요. '최애'가 탈락한 이후로 흥미가 좀 감소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계속 보고 있고요, 또 최근에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있었는데 명절과 함께 끝났어요. 조금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중입니다.


효진: 현재 경희 님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1인 스튜디오 '손에 손잡고'를 운영하고 계시죠. 지금까지의 커리어 패스에 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경희: 처음에는 '미스틱89'라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다녔어요. 그때는 아무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잡일을 해야 하는 포지션이었는데, 거기서 해야 하는 일들이 제가 원하는 방향과 달라서 아주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로 이직을 하게 됐어요. 거기서 업무의 기본기를 다 익히고 난 다음, 약간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현대백화점에 입사했어요. '여기가 진짜 회사구나, 여기가 진짜 한국 사회구나'(웃음)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 5년 정도 일했죠. 행사를 홍보하는 프로모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고, 백화점과 은행이 함께 만드는 체크카드 디자인을 하기도 하고, 상품권 디자인 같은 것도 했어요. 정리하자면 기업이 고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브랜드 이미지를 시각화해서 고객에게 닿는 결과물을 만드는 그런 작업을 했던 거죠.

그러다가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창업한 회사에 입사 제안을 받게 되었어요. 저로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제안이었던 거예요. 회사에서 받았던 안정적인 연봉 같은 것들을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만큼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작은 회사로 이직을 한 다음 로고, 패키지 등 회사를 만들 때 필요한 모든 시각적인 요소를 다 만들었어요. 팀도 제가 꾸렸는데, 대표가 생각하는 저의 역할과 제가 생각하는 저의 역할이 너무 달랐던 것 같아요. 서로 너무 안 맞아서 그 회사에서 제가 약간 쫓기듯이 도망쳤어요. 이후로 저 자신을 좀 진정시키면서 이직할 것인지, 독립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더 이상의 조직 생활은 싫다는 생각에 혼자 일하는 방향으로 결정한 거예요. 그렇게 지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효진: 그럼 '손에 손잡고'를 연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경희: 작년 여름에 시작했으니까 1년 조금 넘었네요.


효진: 어떠세요? 1년 동안 스튜디오를 운영해 보니 할 만하다고 느껴지시나요?

경희: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혼자 일을 처리하는 것 자체는 편하고 좋아서, 큰 조직보다는 역시 혼자 하거나 5인 이내의 소규모 조직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누가 일을 줘야 . 할 수 있는 입장이잖아요. 회사에 있을 때는 싫어도 제가 할 일이 쏟아지는데, 지금은 제가 일을 찾아야 하니까 그게 조금 어려워요.

회사에 다닐 때부터 프리랜서로 일을 받아서 하시던 분들은 자연스럽게 작업이 연결되는데, 저는 갑자기 경력이 뚝 잘린 채로 회사에서 나온 거잖아요. 작년 여름에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싶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 지금은 감사하게도 일이 하나 끝나면 다음 제안이 온다든지 하는 게 있기는 한데, 이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거기에 대한 불안함이 있죠.  


효진: 지난번에 서민주 님이 진행해 주신 '기업 소개서 만들기' 워크숍에 경희 님과 제가 함께 참여했었잖아요. 그때 '손에 손잡고'의 방향성이 굉장히 좋다고 느꼈거든요. 저 같은 경우 초소형 사업자인데, 브랜딩 작업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걸 디자인 스튜디오에 의뢰하기가 여러 가지 여건상 조금 부담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스튜디오에 대한 경희 님의 설명, 그리고 '손에 손잡고'라는 이름을 보면서 이런 작은 사업자라도 디자인 작업을 부탁드리면 같이 잘 고민해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워머스인 조경숙 님과 '도토리제작실'의 브랜딩 작업을 함께 하기도 하셨죠? 

경희: 네, 경숙 님이 저에게 DM으로 브랜딩을 의뢰하고 싶다고 연락 주셔서 함께 작업하게 됐어요. 경숙 님은 제게 너무나 훌륭한 클라이언트였는데요, 일단 본인이 원하는 것이 굉장히 명확하셨어요. '손에 손잡고' 로고가 손 그림이거든요. 경숙 님이 '저는 그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 로고를 만들고 싶어요'라고 하셔서 '알겠습니다' 하고 작업했죠. 

또 제가 디자인을 제안 할 때마다 경숙 님이 칭찬 로봇처럼 '너무 좋아요!'라고 해주셨어요. '칭찬 감옥'에 갇혔더니 경숙 님이 저한테 시키지 않은 일도 하게 돼서 '이런 건 안 필요하세요?' '이것도 쓰세요' 이러면서 뭔가 더 만들어드리고 싶더라고요. (웃음) 


한경희 님이 디자인한 조경숙 님의 브랜드 '도토리 제작실'의 로고. (자료 제공: 한경희)


효진: 경희 님은 FDSC의 회원이시기도 하죠. 언제부터 FDSC에서 활동하셨나요? 

경희: 2019년 초에 FDSC에 가입해서 지금까지 열혈 회원으로 5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네요. 사실 제가 강점 중 '심사숙고'가 탑 5 테마에 들어갈 만큼 의심이 많은 스타일이에요. FDSC도 '뭐 하는 곳이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가입한 후배가 '당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닙니까? 왜 FDSC에 가입을 안 하시죠?'라고 물어봐서 '네, 할게요' 하고 뭔지 모르는 채로 가입했어요.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사부작사부작 뭘 하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됐고,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운동 소모임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FDSC에서 만들었던 <디자인FM>이라는 팟캐스트의 진행을 맡게 됐죠. 진짜 신기한 게 제가 혼자 그냥 '디자이너들은 팟캐스트를 왜 안 하지? 하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FDSC 슬랙에 누가 '팟캐스트 할 사람?' 이렇게 묻는 글을 올렸어요. 제가 하겠다고 손을 들어서 진행하게 된 거예요. 

그걸 하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했어요. 한 번은 한겨레신문 인터뷰에 제가 나왔는데요, 아직도 그게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제가 신문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지. (웃음) 


효진: FDSC로 인해 정말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신 거네요. 또 FDSC가 경희 님께 크게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다면 뭘까요?

경희: 협업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됐다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는 혼자 일하는 게 편한 타입이라, 협업하면서 타인에게 계속 맞춰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또 정해진 대로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한데 협업하다 보면 그걸 벗어나는 동료들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힘들어서 '협업은 싫다, 난 역시 인간이 싫다' 이렇게 늘 생각했는데 <디자인FM>을 만들면서 바뀌었어요. 

방송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방송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죠. 내가 무조건 매번 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주변에 얘기해서 주도적으로 일해도 된다. 그런 사실들을 깨닫게 돼서 정말 즐거웠고, 또 그 팟캐스트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됐거든요. 같은 디자인 직군에 있지만 만나보지 못했던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되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FDSC 전체로 보자면, '다른 사람들도 다 인간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효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경희: 다른 사람들을 보면 다들 자기 자리에서 일도 척척 잘하고,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래서 열등감을 느낄 때도 있고요. FDSC에 가입해서 속속들이 타인의 사정을 알고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다들 사람이라서 나름의 시행착오를 겪고 산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디자이너들의 신화적인 모습을 싫어하게 되기도 했어요. 누구 한 명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포장하거나, 우상화하는 걸 예전보다 좀 더 경계하게 된 것 같아요. 

FDSC에 '디자인 학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거기서 같이 미술, 디자인과 관련된 페미니즘 역사나 이론을 공부해요. 그 시간을 거치면서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됐죠. 방금 말씀드린 우상화나 수도권 중심의 사회를 경계하게 됐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었어요. 


효진: FDSC에서 이미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데, 뉴그라운드에 가입하신 게 놀랍기도 했어요. 어떤 이유로 여기 오게 되셨을까 궁금했거든요.

경희: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디자인 직군이 아닌 사람들과 얘기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제 친구들 중 대부분은 디자이너고, 디자이너가 아닌 친구들은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라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좀 그렇거든요. 그래서 디자인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어요. 저의 탐구 테마를 세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디자인, 하나는 여성, 하나는 일이거든요. '나는 왜 일하는가?'를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뉴그라운드가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효진: 그렇군요. 다가올 시즌까지 셈하면 경희 님도 어느덧 뉴그라운드에서 세 시즌을 보내게 되시는 건데요, 계속 가입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경희: 일단 저는 친해지기로 한번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친해져야지, 중간에 그만두고 이런 거 잘 없고요. (웃음) 아직은 제가 뉴그라운드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거나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해서 계속 지속적으로 가입을 연장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조금 더 친해지려면 모임을 주도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그건 조금 부끄러워서 못 하고 있네요. 

일에 관한 이야기도 제가 직접 하지 않더라도, 다른 워머스분들이 슬랙 채널에 많이 써주시잖아요. '퇴근길 일기' 같은 것들이요. 자기 일에서의 고민이나 걱정을 자연스럽게 꺼내시는 것 같아서 그걸 보면서 다른 직군의 일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하고 있다고 느껴요. 


효진: 다음 시즌에서 경희 님이 열고 싶은 모임도 있을까요?

경희: FDSC 멤버들과 뉴그라운드 멤버들 몇 명을 모아서 같이 달리기 모임을 한번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1회차 정도로요. 같이 운동하고 얘기를 나누면 확실히 서로 빨리 친해지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수영장 원정 모임도 열거나 참여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효진: 다 같이 만나서 달리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으면 너무 좋겠네요. 이제 2024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남은 2024년을 어떻게 보낼 계획이세요?

경희: 일단 11월에는 '언리미티드에디션'에 참여해요. 이제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걸 하다 보면 11월 중순이 훌쩍 지나있을 것 같아요. 그게 끝나면 바로 이어서 대만 북페어랑 도쿄 아트북페어가 있어요. 지난여름에 휴가를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두 곳에 가는 것을 저에게 휴가로 주려고 해요. 그 여행까지 다녀오고 나면 연말을 편하게 보내면서 내년에 '손에 손잡고'를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효진: 이 인터뷰가 뉴그라운드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에도 공개될 거라서, 나중에 경희 님께 일을 제안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을 위해 경희 님이 선호하시는 방향의 일이나 일을 제안할 때의 방법 같은 것들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경희: 선호하는 일은 어떤 브랜드나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일이에요. 제가 기획적으로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업에 관해 설명해 주시면 '당신은 지금 이걸 하고 싶습니다!'라고 정리해드리는 걸 잘하는 편이거든요. 아이덴티티 만드는 일을 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큰 기업에서 돈을 받아서 작은 사업체를 돕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예산을 오픈해 주시면 제가 그 안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같이 일을 할 수 있어요. 저의 장점 중 하나가 있는 자원 안에서 그것을 잘 쓰는 거거든요. 함께 목표를 설정해서 동등한 관계로 대화해나가면서 프로젝트를 같이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요.